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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중앙시평] 경제학원론과 정반대의 위험한 소득주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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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경제학원론과 전혀 다른

소득주도성장 실험이 진행 중

청와대, 섣부른 폭주 잠시 멈추고

다양한 의견에도 귀 기울였으면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주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고 했다. 그만큼 외로운 길이다. 극소수가 ‘믿는’ 가설(假說)이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청와대는 두 명의 해외 귀빈에게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권위를 빌려 소득주도성장론을 공인받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중 한 명이 국제통화기금(IMF)의 라가르드 총재. 그녀는 그러나 문 대통령을 만난 뒤 “소득주도성장은 일부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균형을 잡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IMF는 한국 정부가 주요 이사국이자 외교적 발언에 능한 국제기구다. 그런데도 라가르드가 “신중하라”고 주문한 것은 우회적 경고나 다름없다. 함께 방한한 IMF 전문가들은 사석에서 “IMF가 강조하는 포용적 성장과 소득주도성장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4년 전부터 한국은 최저임금을 해마다 6.1~8.1%씩 세계에서 가장 가파르게 올렸는데 그만큼 경제가 급성장했느냐”고 반문했다. 못 믿겠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축복 세례를 갈망했던 또 한 명의 귀빈은 슈뢰더 전 독일 총리다. 독일 경제의 성공신화를 쓴 주인공이다. 소득주도성장론에 따르면 슈뢰더는 경제위기 때 임금을 올리고 복지도 늘렸어야 했다. 그래야 가계소득이 증가하고 소비와 투자가 늘어 경제가 성장한다. 하지만 2003년 ‘하르츠 개혁’은 소득주도성장과 정반대다. 노사정 합의로 실질임금을 깎고 복지혜택도 축소한 것이다. 대신 독일 기업들은 해외로 옮기지 않고 국내에 투자해 일자리를 만들었다. 만약 청와대가 슈뢰더로부터 “소득주도성장은 좋은 정책”이라는 칭찬을 기대했다면 염치없는 일이다.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은 대부분 국내파다. 차가운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식민지반봉건론·주변부자본주의·종속이론·국가독점자본주의 등에 천착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지금 386 운동권과 함께 집권해 경제 운영의 주체가 됐다. 문제는 이들의 소득주도성장이 한마디로 물리학의 영구기관과 같은 논리라는 점이다. 임금을 올리면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다시 임금이 올라간다는, 무한동력의 반복이다. 하지만 역사상 영구기관을 발명했다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은 모두 사기로 드러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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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경제학 교과서의 나라다. 조순·정운찬의 『경제학원론』이 지난 40여 년간 20만 권 이상 팔렸고, 고시 필독서라는 『현대경제학원론』도 35만 권 넘게 팔렸다. 어찌 그뿐이랴. 『맨큐의 경제학』은 전 세계 판매량 250만 부 중 30만 부 이상이 한국에서 팔렸다. 이 교과서들은 한결같이 ‘소득은 성장의 결과이지 성장의 원천이 아니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열심히 경제학원론을 공부해온 한국에서 소득이 성장의 원천이라는 정반대의 소득주도성장론이 먹혀드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맨큐의 경제학』 145~146쪽을 보자. “가격 통제는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최저임금제로 일부 근로자들의 소득은 올라가지만 다른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맨큐 교수는 “최저임금이 10% 오르면 경제성장률이 소폭 떨어지고 청년 고용도 1~3% 하락한다는 실증 결과가 학계에 보고돼 있다”고 강조한다. 소득주도성장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 소득주도성장이 한국에서 과학적 사실로 입증되면 경제학 교과서는 모조리 새로 써야 할 판이다.

요즘 청와대발(發) 소득주도성장론이 독주하면서 경제부처 관료들은 납짝 엎드려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산업연구원(KIET)·금융연구원 등도 침묵하고 노동연구원 출신들만 줄줄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날개를 달았다. 주요 대학 경제학 교수들도 입을 다문다. 이들은 “소득주도성장론은 믿음과 신념이지 검증된 경제학이 아니다. 그러나 기업이나 투자의 중요성을 꺼냈다가 자칫 ‘적폐’로 몰릴까 두렵다”며 숨죽이고 있다.

문 대통령의 “일자리에 쓰는 게 가장 값진 세금”이란 발언도 문제가 있다. 국세청 홈페이지에 가보면 어떤 게 값진 세금인지 알 수 있다. 문 닫기 직전의 동물원에 소규모 세금을 투입해 ‘체험 동물원’으로 바꿔 수많은 시민이 즐기는 성공사례 등이 나와 있다. 한마디로 똑같은 세금을 투입해 더 큰 공공효용을 거두는 것을 ‘값진 세금’이라 못 박고 있다. 이 정부가 혹 녹색성장과 창조경제에 들어가는 세금은 낭비요, 공무원 늘리는 데 쓰는 혈세는 좋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지금 한국은 경제학 교과서와 정반대의 위험한 생체실험을 당하고 있다. 잘못하면 치명적인 후유증을 낳는다. 섣부른 소득주도성장의 폭주를 잠시 멈추고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의견에도 귀를 열었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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