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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매수라 썼어도…매도로 읽어주세요” 애널리스트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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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증권사 투자의견 0.17%만 ‘매도’

비판 쓰면 기업은 탐방 거부

주식 가진 기관들 항의세례

연봉도 기관 인기투표가 좌지우지

베스트 애널 랭킹서 빠지면

회사가 부른다 “지점 나갈래?”



한겨레

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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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증권사의 기업분석 보고서는 왜 매수 추천 일색일까? 분석 대상 상장사의 일감을 따내고 펀드매니저들의 주식거래를 몰아오는 데 기여한 연구원(애널리스트)에게 증권사들이 보상을 해주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금융감독원은 증권사 보고서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이달부터 목표주가와 실제주가 사이의 최근 2년간 격차(괴리율)를 연구원들이 수치로 표기하도록 했다. 하지만 현장의 연구원들은 매도 보고서를 쓸 수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항변한다.

10일 금융투자협회의 ‘증권사 리포트 투자의견 비율’ 통계를 보면, 국내 31개 증권사의 상장사에 대한 매수 의견은 88%를 넘고 매도 의견은 0.16%에 그쳤다. 매도 의견을 1건도 안 낸 증권사가 25곳이나 됐다. 반면 외국계 증권사의 매수 의견은 절반을 조금 넘은 54.6%였고 매도 의견도 14.1%에 이르렀다.

코스피가 8개월 연속 상승을 멈추고 지난달부터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연구원들의 기업 실적 전망은 여전히 ‘낙관적 편향’을 보이고 있다. 증권사 연구원들의 추정 실적을 평균한 값이 시장 전망치(컨센서스)다. 한 연구원이 관심을 끌기 위해 이익 추정치를 올리면 너도나도 따라 올리는 ‘군집행동’이 일어나 컨센서스는 기업이 실제 발표하는 실적에 견줘 대개 높게 형성된다. 실제 이익이 시장 예상보다 낮을 경우 ‘실적 충격’(어닝 쇼크)으로 주가가 하락한다. 케이비(KB)증권 자료를 보면, 2012년 이후 기업의 분기 이익이 전망치를 밑돈 경우가 62.2%에 달했다. 특히 3~4분기에 실적 충격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이익이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연초 전망치를 수정해 연말로 갈수록 낮춰 잡는 현상이 나타난다. 올해 3분기 실적 전망치도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다. 정재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연초 이후 16.6%나 높여 잡은 상장사의 3분기 영업이익 전망치가 최근 한달 새 0.7% 하향 조정됐고 앞으로 더 낮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홍춘욱 키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국제통화기금(IMF) 등 경제전망 기관들도 처음에는 매우 낙관적인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제시한 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하향 조정한다”며 “기업들이 사업계획을 작성할 때 주로 참고하는 공신력 있는 기관의 전망이 너무 비관적이면 경기를 침체의 늪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반면 미국 기업은 셋 중 둘꼴로 시장 예상을 웃도는 ‘깜짝 실적’을 발표한다. 김일구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기업이 경영을 잘한 영향도 있지만, 연구원들이 이익 추정치를 부풀리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외국의 금융 연구논문들을 보면, 애널리스트의 낙관적 편향은 △기업 경영진으로부터 내부 정보 획득 △증권발행 업무 주관 등 일감 따오기 △주식 거래량 증가로 증권사 수수료 기여 △연구원 개인의 경력 관리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증권사들은 낙관적인 추정치 발표로 일감과 수수료 증가에 기여한 연구원들에게 높은 보상을 제공한다. <금융저널>에 실린 ‘애널리스트를 해부한다’는 논문을 보면, 낙관적인 예측을 내놓은 연구원들은 골드만삭스 등 업계 순위가 높은 투자은행으로 이직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소속 증권사가 인수 업무를 맡고 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연구원들이 ‘분석의 정확성을 내던져버린 것 같았다’고 평가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중요한 대기업 ‘출입처’에는 증권사들이 낙관적 성향의 연구원을 배정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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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관계자는 “외국계 증권사는 매도와 중립(보유) 의견이 40%대에 이르지만, 기업의 주식·채권 발행 업무가 활발한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거래관계 유지를 위해 매도 의견 내는 걸 꺼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증권사 연구원들은 한국적 토양에서 매도 보고서가 미치는 ‘평판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대형 증권사 연구원은 “비관적인 내용을 쓰면 해당 기업은 탐방을 거부하고, 주식을 보유한 기관이나 일반투자자는 항의 전화를 걸어와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한다. 매도 보고서가 무슨 ‘독립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리스크를 짊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탓에 일부 증권사들은 보고서에 연구원의 전화번호를 없애거나 일반인의 직접 통화를 차단하고 있다. 험한 일을 한번 겪고 난 연구원은 보고서 본문에는 비판적인 내용을 적더라도 투자의견은 매수나 중립으로 매긴다. 매수로 쓰고 매도로 읽는다는 의미다.

외국계 증권사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외국계 보고서는 기관 등 특정 고객층에 유료로 서비스된다”며 “불특정 다수에게 무료로 뿌려지는 국내 보고서와는 태생적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증권사 연구원의 보수 산정 기준이 ‘베스트 애널리스트’ 선정 등 기관투자가의 인기투표나 법인 영업부서의 주관적 평판에 좌우되는 현실이 바뀌어야 ‘소신 보고서’가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한다. 한 증권사의 수석연구원도 “일 열심히 하다 잘린 사람은 있어도 폴(투표) 잘 받아 잘린 사람은 못 봤다고 할 정도로 기관이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연구원 연봉 결정권은 리서치센터장이 갖는다고 명시는 돼 있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폴에서 몇등 했냐에 따라 책정됐다”고 말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베스트 애널’에 자사 연구원을 다수 배출하고 있는 증권사들 중심으로 폴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30대 한 연구원은 “선배들은 예전에 30~50명씩 모아놓고 세미나를 했다는데 지금은 1~2명을 상대로 피티(프레젠테이션)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여러 일정을 강행군하고 있다”며 “그런 자리에서 사적인 정보를 건네줘야 내 표로 확실히 굳어진다. 이 동네에도 갑을관계가 뿌리깊다”고 말했다. 40대 연구원은 이렇게 털어놨다. “내 나이 되면 베스트 애널 랭킹에서 빠지고,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세미나를 못 다니면 회사에서 조용히 부른다. 지점 갈래?”

국내 저널인 <금융연구>의 ‘애널리스트 낙관주의…’(2015년) 논문을 보면, 연구원의 낙관적 편의는 기업 정보의 불투명성과 주가급락 위험을 증가시킨다. 낙관적 전망이 빈번하게 나오는 시점은 대체로 주가가 고점을 찍는 국면이어서 투자자의 손실이 우려된다. 월가의 살아있는 전설 피터 린치는 “보유 중인 10개 종목 중 6개만 수익이 나면 감사해야 한다”고 저서에 썼다. 개인 투자자도 증권사의 예측이 10개 중 4개는 빗나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광덕 선임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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