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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당신 덕분에 숨쉬었습니다"…'자유인' 마광수 영면(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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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광수 연세대 교수 영결식

뉴스1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영정이 영결식장으로 운구되고 있다. 2017.9.7/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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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마광수를 누구에 비교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는 그가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광수는 마광수'입니다."

고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1951~2017)의 영결식이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영결식장에서 거행됐다. 마 교수의 약력을 설명하던 대광고 동창인 이종호씨는 "마광수는 마광수"라면서 어떤 이름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표현했다.

영결식장에는 유족들과, 고인이 나온 대광중·고교의 벗들, 수십 년간의 교편생활로 배출한 제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위선과 가식을 벗어던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그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고인의 애제자였던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고별사를 영전에 바쳤다. 그는 "선생님을 영결식 혹은 발인이라는 순간으로 뵐 줄은 정말 몰랐다"고 울먹이면서 "지금의 우리보다 까마득하게 젊으셨던 시절,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으로 오셨고 선생님의 연구실은 우리의 상담소요, 휴식처요, 세미나룸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영결식장에는 연세대 '13학번'인 제자가 들려주는 트럼펫 연주 '대니 보이'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때 선생님 강의를 듣고 감명받았다"는 젊은 제자는 "부고 기사를 본 후 곡으로라도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곡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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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故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영결식에서 유가족이 영정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2017.9.7/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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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등학교(대광중·고)를 함께 한 친구들과 더불어 특히 영결식장을 채운 이들은 마 교수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며 빛나던 시기인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을 함께 한 제자들이었다. 87학번 제자라는 김성숙 씨는 "선생님은 제자들의 결혼식과 돌잔치에 빠짐없이 참석하던 분"이라면서 "우리 학번 카카오톡 단체방이 눈물바다"라고 말했다.

마 교수의 제자이자 소설 '즐거운 사라'의 영화화를 추진했던 임장미 감독은 "2007년 영화사를 만들어 영화를 만들려던 차에 선생님이 '나 네이버에 이름이 올랐다'고 전화하셨다. '즐거운 사라'를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고 약식기소된 거다. 그 일로 선생님은 벌금 200만원을 내셨다"고 말했다. 이어 "글을 썼다고 감옥에 가두고 벌금을 매기는 사회를 용서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추모객들은 고인이 글쓰는 것, 상상하는 것, 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던 순수한 이였다고 회고했다. 시와 평론 등으로 정식 등단한 문인임에도 '에로티시즘 문학'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학계와 문단에서 배척받았지만 제자들은 책 '마광수는 옳다' 등을 펴내며 마 교수를 지지했다.

마광수 교수는 지난 5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이 우울증에 의한 자살인 것으로 전해졌지만 위선에 찬 사회가 그를 죽였다면서 '사회적 타살'이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영결식은 대광고 21회 동문회가 주최했으며 발인예배도 겸했다. 고 마광수 교수는 화장된 후 분당 휴 공원에 안치됐다.

한편 이날 영결식에 앞서 지난 5일과 6일, 마 교수의 빈소에도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해 고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슬퍼했다. 조문객 대부분은 영결식과 마찬가지로 마 교수가 가르치던 제자들과 학교 동창들이었다. 제자들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연세대 강단에 섰던 마 교수를 딱딱한 '교수님'이라는 명칭 대신에 '선생님', 나이 차가 적은 경우 심지어 '광수 형'이라고 부르던 1980년대~ 90년대 초의 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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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순천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2017.9.5/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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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서적을 읽고 낭만이 죄악시되던 시대에 선생님은 '너 꼴리는 대로 살라'고 말하시곤 했어요. '학생운동을 해야 한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이 가해지던 시대였는데 선생님을 보거나 강의를 들으면 숨통이 트였어요."

지난 6일 빈소에서 연대 국문과 85학번 제자라는 한 여성은 이같이 말하며 "선생님의 시에 '나를 버리고 간 그년'이라는 시가 있는데 장례식장에 가면 '나 살아 있을때 오지 왜 지금 오냐'고 웃으실 거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대학원 제자는 "'즐거운 사라' 때문에 선생님이 한복 입고 줄에 묶여 재판받으시는 모습을 참관했었다"면서 "화가 날법한데도 분노나 조롱의 느낌이 전혀 없이 시종일관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라고 깍듯이 했다. '정말 선비같은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입을 모아 "변태, 외설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선생님은 실생활에서는 추문 한 번 나지 않은 '젠틀'한 분"이라면서 "그래서 더 외로우셨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또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는 분임에도 정작 자신은 비난과 조롱 속에서 사셨다"고 안타까워 했다.

제자는 아니지만 고인과 가깝게 지냈다는 한 조문객은 "2005년에 처음 뵈었는데 너무 순수하셨다.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마음 속으로 지지했다"면서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가 본보기 삼아 마 교수를 핍박한 것 아니냐"고 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심했다면서 자책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 교수는 늘 자신의 연구실을 사랑방처럼 열어놓아 제자들을 만나왔고 제자들의 결혼식이나 돌잔치, 그 밖의 자잘한 행사에 늘 함께 했다고 했다. 하지만 제자들에 따르면 마 교수는 정작 자신 노모가 돌아가셨을때도 제자들에게 부담이 된다며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하루 2~3갑 가느다란 '장미' 담배를 즐겨 태우던 마 교수를 그리워해서인지 향불 대신 가느다란 담배에 불을 붙여 영전에 바친 이들도 있었다. 제자들과 친구들 외에도 '즐거운 사라'의 외설성 여부가 법의 심판을 받을 당시 마 교수 편에 섰던 소설가 하일지, 시인이자 영화평론가 하재봉, 제자인 소설가 김별아, 고인의 뒤를 이어 '윤동주 전문가'가 된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등이 조문 기간 중 빈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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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광수 교수(연세대 국어국문학과 홈페이지). ©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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