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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최선을 다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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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겨레2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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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추천으로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최근에야 보았다. 스파이 신분을 감춘 채 가장 보통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영화 주인공은 비범한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이 살아가는 스즈메(우에노 주리)다. 존재감 없는 자신의 삶에 씁쓸함을 느끼던 어느 날, 스즈메는 계단 귀퉁이에 붙은 손톱만 한 ‘스파이 모집’ 광고를 발견한다. 그렇게 우연히 스파이 길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일상에서 빈번히 스쳐 지나가던 평범한 인물들이 실은 스파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깝다니, 어느 쪽이요?

그중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스즈메의 단골 라면집 주인장(마쓰시게 유타카)이다. 누구나 “어중간한 맛”이라고 평하는 이 집의 라면을 스즈메는 이상하게도 좋아한다. 알고 보니 라면집 주인장 역시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스파이였다. 그는 자신이 사실 라면을 아주 맛있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라면이 맛있어 손님이 잔뜩 몰리고 식당이 유명해지면 신분을 들킬 수 있기에 눈에 띄지 않는 맛을 유지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본부에서 본격적인 지령이 내려온 적은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눈에 띄지 않도록 ‘어중간한 맛’을 만들어내는 일이 일단은 아저씨의 임무다.

본부 같은 건 없지 않을까 의심이 들 때쯤, 평범한 스파이들은 비로소 호출 신호를 받는다. 이제 내일 밤 9시면 스파이들은 보통 사람의 일상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출동을 앞둔 마지막 저녁, 라면집 주인장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맛있는 라면을 만든다. 그런데 “맛있는 라면을 만들고 있어”라는 라면집 주인장의 대사에 나는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저 주인장이 맛있는 라면을 만들 수 없다면 어떡하지? 어중간한 맛을 위해 노력해온 20년 탓에 맛있는 라면을 만드는 법을 잊었다면 어떡하지?

다행히 괜한 걱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힘껏 맛있는 라면을 만든 주인장은 동료 스파이이자 두부가게 아저씨에게 그 라면을 대접한다. 한 젓가락을 입에 넣고 난 두부가게 아저씨는 말한다.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만들 줄 알면서 내내 그런 어중간한 라면을 만들며 살았다니, 아깝지 않았어?” 이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라면집 주인장은 답한다. “뭐,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나는 6년 넘게 조직에 속하지 않은 채로 최소 네다섯 가지의 일을 전전하며 지내다 두 달여 전부터 직장생활로 다시 돌아왔다. 예전에 투자업계의 일을 했고, 지금 다시 다니는 직장도 분야는 좀 다르지만 결국 투자 일을 하는 곳이다. 내가 다시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순전한 놀라움과 함께 축하나 응원을 전한 쪽, 그리고 “아까웠다”고 하는 쪽과 “아깝다”고 이야기하는 쪽. “아까웠다”고 하는 사람들은 “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을 놔두고 능력을 썩히는 게 아까웠는데 이제 잘됐구나” 같은 인사를 건넸다. 어떤 의미로든 내 능력을 과대히 보아주는 것이니 감사한 일이다. “아깝다”고 말하는 쪽은 “자유롭게 사는 모습이 좋았는데, 다시 직장에 들어간다니 아깝다”는 취지인 것이다. 조직 없이 일하며 누리는 자유를 내가 새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니, 역시 끄덕끄덕하며 웃을 수밖에 달리 반박할 것도 없다.

완벽하게 어중간한

그렇지만 뒤늦게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보고 나니 나도 저렇게 답했을지 싶다. “뭐,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요”라고. 어느 쪽 길을 가더라도 언제나 아까운 것은 있기 마련이다.

라면집 주인장은 스파이 임무를 위해 떠나면서 스즈메에게 자신만의 라면 레시피를 남긴다. 맛있는 라면이 아니라 어중간한 맛 라면의 레시피다. 다른 곳에선 절대 먹을 수 없는, 완벽하게 어중간한 맛. 스즈메에게는 가장 특별한 맛이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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