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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법과 사회] 김대업, 그리고 이석기와 한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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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兵風 사건' 주역 김대업… 盧, 정권에 功 있다 사면 시도

촛불 단체 "李·韓 석방" 요구, 법 고쳐 '빚 갚기 사면' 끊어야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사면(赦免) 실무를 맡는 법무부 관계자들조차 경악했던 사면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막판인 2007년 12월 31일 발표한 사면이다. 자신의 측근은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인사들을 대거 사면했다. 불법 도청을 묵인한 혐의로 기소됐던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 두 명은 형(刑) 확정 나흘 만에 사면을 받았다. 판결문 잉크도 마르기 전이었다. '빚 갚기 사면' '무원칙 사면'의 완결판이란 비판이 나왔다.

압권은 '병풍(兵風) 사건' 주역인 김대업씨 사면 시도였다. 김씨는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폭로해 노 대통령 당선에 적잖은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고 폭로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사람을 청와대가 임기 막판 슬그머니 사면 명단에 끼워 넣은 것이다. 웬만큼 낯 두껍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이다. "빚 갚으라"는 김씨 측의 은밀한 요구가 있었다는 말이 나왔다. 법무부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지만 강행했더라면 최악의 사면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그 일을 지금 떠올리는 건 그때와 비슷한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어서다. 대선 직후부터 '촛불 단체'들은 국가 기간시설 타격을 모의해 징역 9년이 확정된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불법 폭력 시위를 주도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을 '양심수'로 둔갑시켜 8·15 광복절 특별사면을 요구했다. 거리로 나와 "박근혜 정권에 분노하고 싸워서 이긴 건 이 전 의원과 한 위원장"이라며 "조건 없이 사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권 창출에 공이 있으니 사면해달라고 하는 게 10년 전과 똑같다. 요구가 노골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일보

2016년 12월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한 단체가 이석기 전 의원 구명을 위한 서명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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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지난달 "준비 시간이 부족해 광복절 특사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광복절 사드 반대 집회 와중에도 '이석기, 한상균 석방'을 외쳤다. 추석, 성탄절이 다가오면 또 거리로 나올 것이다. 확실한 '채권'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청와대로선 끝까지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작년 말 야권 인사들이 재판부에 한 위원장 석방 탄원서를 낼 때 함께 서명했다. 사면을 계속 미루면 촛불 단체들은 "그건 뭐였느냐"고 따질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 전 의원과도 지우기 어려운 인연이 있다. 노무현 정부는 반(反)국가단체인 민혁당 결성 혐의로 복역 중이던 이 전 의원을 정부 출범 첫해 광복절 특사로 풀어주고 다시 2년 뒤에 복권시켜 선거에 나설 수 있게 했다. 그 덕에 그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시 사면 업무를 다룬 청와대 민정수석이 문 대통령이었다. 이번에 그를 사면하면 세 번째가 된다.

이런 사면을 납득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막기 어렵다. 사면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사면법에 아무런 사면 기준이 없지만 법을 바꿔 규제 장치를 두면 된다. 헌법(79조1항)도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사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얼마든지 사면 권한과 절차를 법률로 정할 수 있게 돼 있다. 예컨대 어떤 범죄는 사면이 안 되고, 형기(刑期)의 일정 기간을 채워야 사면할 수 있다는 등의 제한 규정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1948년 사면법을 만든 이후 그런 노력을 이제껏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마구잡이 사면을 남발할 수 있게 길을 터준 셈이다.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다.

사면권은 야당일 때는 비판해도 정권 잡으면 놓치고 싶지 않은 기득권이다. 이제껏 제대로 개정이 안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번 정권이 진정 적폐 청산을 원한다면 사면법부터 고쳐 '사면 적폐'를 없애기 바란다. 그래야 '빚 갚기 사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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