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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이공계 '전문연구요원'이 뭐길래…전공보다 영어 공부에 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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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공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고 있는 A씨는 수년째 ‘전문연구요원’(이하 전문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문연 선발 평가 항목인 학점을 잘 받기 위해 학점이 후하다는 강의만 골라 수강신청했지만, 요즘은 밤늦도록 텝스(TEPS) 공부에 매진하느라 그나마도 연구에 집중하기 어렵다. A씨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면서 다른 학생들에게 연구실 일이 몰려 눈치가 보이지만 A씨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한다. 지도교수도 A씨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이를 묵인해주고 있다.

A씨는 “졸업을 최대 2년 미루면서 전문연 선발 시험을 준비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아 피가 마른다”면서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전공 연구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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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대학교 이과대학 게시판에 병역특례 전문연구요원 선발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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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전문가를 꿈꾸는 공대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전문연’ 경쟁에 매달리느라 본업인 전공 연구까지 소홀히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문연은 이공계 석사 학위 이상 소지자가 병무청 지정 연구기관에서 연구개발 업무에 3년간 종사하며 군 복무를 대신하는 병역특례 제도다. 국가 과학기술과 학문 발전에 기여하고 인재 해외 유출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1973년 도입돼 45년째 시행되고 있다.

실제 이 제도가 인재 해외 유출을 막고 국내 대학원에서 연구를 이어가도록 하는 효과는 어느 정도 입증됐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2012년 6월 서울대, 카이스트, 연세대 등 주요 대학 소속 전문연 500명과 병무청 지정 연구기관 소속 전문연 247명 등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이 제도가 없었다면 10명 중 8명은 해외 유학(42.0%)이나 취업(38.8%)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전문연 제도가 이공계 유인 효과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학 연구요원은 76.2%가, 기업 연구요원들은 65.6%가 ‘그렇다’고 답했다. 연구직 유인 효과 역시 대학 연구요원은 80.6%, 기업 연구요원은 67.6%가 긍정적이라고 응답했다.

그런데 수도권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지나치게 높은 영어점수 요건 때문에 연구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며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수도권 대학원에 진학한 이공계 인재들이 전문연에 선발되려면 영어 공부에 과도한 노력을 쏟아야 해 정작 연구는 뒤로 밀려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공계 남학생들 울리는 ‘전문연’이 뭐길래…
“연구는 뒷전, 매일 영어 공부만 하고 있어요”

전문연 모집 대상은 기업, 연구기관, 자연계 대학원 박사과정 세 가지로 나뉜다. 자연계 박사과정 전문연은 전국의 공대·자연대 대학원 박사나 석박사 통합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모집한다.

지원 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이상, 텝스(TEPS) 성적이 있어야 한다. 총 600점 만점에 석사 성적 300점, 텝스 점수 300점을 반영해 성적순으로 뽑는다. 대학원 성적은 사실상 편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영어성적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선발인원이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 있어 대학이 많은 수도권 경쟁률이 비수도권에 비해 약 2배 높다. 수도권 대학원생들의 전문연 텝스 합격 안정권 점수는 700점 중후반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 지원 때 기준이 되는 텝스 점수(600점)보다 150점 이상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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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구재단 제공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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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대학원생은 “교수가 영어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연구에서 빼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일이 몰려 불만이 생긴다”며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수도권 학생들이 영어성적을 올리는 데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윤호 서울과학기술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학생들의 인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교수들도 어쩔 수 없이 공부 시간을 보장해주게 되는 것 같다”면서 “공대생의 병역특례에 영어점수가 왜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대학원생들이 영어공부 때문에 지나친 압박을 받아 연구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선발 인원을 늘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전문연을 뽑는 회사와 학교가 ‘모종의 합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권의 한 대학원생은 “기업과 함께 과제를 진행하는 연구실 학생을 기업에서 병역특례에 뽑아주기도 한다”며 “하지만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경우엔 영어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 결국 현역으로 입대 후 제대해서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게 된다”고 전했다.

“선발 인원 늘리고 수도권·非수도권 공개 경쟁해야”
“영어성적이 아닌 연구실적으로 평가해야”

과거에 비해 지원자 수가 증가한 것도 전문연 선발 경쟁률을 높이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1993년에는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에 518명이 지원해 505명을 선발했지만, 지난해엔 600명을 뽑는데 1528명이 지원했고 그 중 1216명이 수도권 학생들이었다. 매년 선발 인원은 500~600명 선으로 엇비슷했지만 경쟁률은 훨씬 높아졌다. 이유가 뭘까.

현장에선 첫 번째 이유로 취업난을 꼽는다. 과거엔 학생들이 학사 졸업 후 대부분 쉽게 취업할 수 있었지만, 요즘엔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학교에 남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시행된 ‘지역할당제’도 수도권 지원자들의 경쟁률을 높였다. 뽑는 정원은 엇비슷한데 지방 학생들이 전체 정원의 30%를 할당받기 시작하면서 수도권 학생들이 통과해야 할 ‘바늘구멍’은 더욱 좁아졌다.

전문연 경쟁에서 애를 먹고 있는 수도권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이처럼 수도권·비수도권으로 지역을 나눠 뽑는 제도와 과도한 영어 배점을 문제점으로 꼽는다.

한 수도권 이공계 대학원생 김모(28)씨는 “전문연 취지답게 영어성적이 아닌 연구 실적이나 역량을 평가해 선발하는 게 타당하다”며 “수도권에 박사과정생이 많은 학교들이 몰려 있어 비수도권 특정 학교는 지원만 하면 거의 다 합격하는 불공평한 상황”이라고 했다. 또 “이공계열 발전에 도움되는 사람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인데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눠 뽑는 건 취지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비수도권 30% 할당제를 도입하기 전 공개경쟁을 통해 전문연을 뽑을 때는 비수도권 출신 합격자 비율은 20%를 밑돌았다.

또 다른 이공계 대학원생은 “텝스 시험은 다른 공인영어 시험에 비해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있고, 점수를 높이려면 여러 번 시험을 쳐야 해 돈과 시간 소모가 너무 크다”며 “영어 시험을 꼭 봐야 한다면 전문연 응시생들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등에서 영어 시험을 다같이 보게 했으면 한다”고 했다.

한국연구재단 인재양성사업팀 서형관 팀장은 “수도권 대학원생들이 비수도권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어 성적이 높아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부분도 있다”며 “공인 영어 성적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해도 결국 학생들에겐 영어성적과 똑같은 부담감을 주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업·연구계획을 제출한다면 주관적인 평가가 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변별력을 가진 한국사와 공인 영어 성적, 석사 성적을 볼 수밖에 없다”며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문연구요원 선발인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공계 남학생들의 애타는 심정과는 달리 국방부는 병역 자원 부족 문제 때문에 전문연 선발 인원을 늘리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전문연구요원을 감축할지 현행대로 유지할지 논의하는 단계”라며 “2020년대 초반부터 병력이 부족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전문연을 포함한 전환대체복무 지원 인력 감축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권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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