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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자살이 아니다, 그건 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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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밥&법] 죽음, 정신질환 그리고 업무상 재해



한겨레

2015년 자살자 1만3436명 중 559명(4.2%)의 자살 동기는 ‘직장이나 업무상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업무상 이유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살 같은 자해행위를 했다는 게 의학적으로 인정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자살 예방을 위해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에스오에스(SOS) 생명의 전화’.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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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의 <2017년 자살예방백서>를 보면 2015년 자살자는 1만3513명(통계청 집계)으로, 전체 사망 원인 중 5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살자 가운데 취업자와 비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학생·가사·무직이 57.6%(7784명), 취업자는 42.4%(5729명)로 나타난다. 2011년 통계에서 자살자 중 비취업자의 비율이 61%(9706명), 취업자 비율이 39%(6200명)였던 것에 비춰보면,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 중 취업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고 있는 추세다.

취업자들이 이런 선택을 한 원인을 파악할 만한 통계는 없다. 다만 ‘자살 동기’가 기록된 경찰청 통계 수치를 보면, 2015년 사망자 1만3436명 중 559명(4.2%)의 동기가 ‘직장이나 업무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돼 있다. 2012년엔 577명, 2013년엔 561명, 2014년엔 552명으로 기록돼 있다. ‘직장 및 업무’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한 해 500명 안팎의 희생자를 내고 있는 셈이다. 자살까지 이르진 않았어도 ‘직장 및 업무’에 따른 정신질환 피해자 규모도 상당하겠지만, 이 역시 정확한 통계는 없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시행령 제36조는 업무상 이유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살 같은 자해행위를 했다는 게 의학적으로 인정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업무와 관련해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등으로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적응장애,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 역시 업무상 재해로 보고 있다.

이처럼 우리 산재보험법은 노동자의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론 노동자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한겨레>는 권동희 노무사(법률사무소 새날)와 함께 2000년부터 2016년까지 법원에서 업무상 재해라고 확정한 21건의 자살·정신질환 판결문을 분석했다.

■ ‘업무 변화’가 스트레스 1위 노동자가 자살하거나 정신질환을 얻는 이유는 한 가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여러 직장 스트레스 원인 중 ‘업무 변화’가 유독 많이 지목된 점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콘도 총무팀에서 일하던 이아무개씨는 2009년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객실 관리를 맡게 됐다. 500개가 넘는 객실을 유지·관리하는 업무는 이씨에게 낯설었는데, 부총지배인은 객실 전화기에 붙은 스티커 제거, 에어컨 점검 등을 지시하고도 “그 일이 그만큼 오래 걸려요?”라고 수시로 독촉했다. 객실 관리 업무를 맡은 뒤 이씨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거나 불안한 모습까지 보였다. 2010년 8월 이씨는 업무 수행의 어려움, 회사의 위법한 업무 처리 등을 적은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대구고법은 지난해 7월 “갑작스러운 담당 사무의 변경, 변경된 사무로 인한 자존심 손상,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에 직면해 극심한 업무상의 스트레스를 받아 급격한 우울증세 등이 유발됐다”며 이씨의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2000년~2016년 산재 판결받은
자살·정신질환 21건 분석해보니

‘업무 변화’ 스트레스 1위
콘도 총무 직원을 객실관리 배치
일 서툰데 “아직 안 끝냈냐” 독촉
스트레스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

성과주의 희생자들
매출 압박받던 IPTV 사업부장
기사 부담 짓눌렸던 중견 기자
불면·불안 시달리다 목숨 끊어

해고는 복직 뒤까지 상처 남기고
열악한 환경이 정신질환 유발도


군수 산업체에 다니던 정아무개씨는 군수관측 장비 조립·시험을 하다 2012년 8월 사격통제반으로 옮긴 뒤 큰 스트레스를 받아 퇴사까지 고민했다. 결국 정씨는 같은 해 10월12일 병원을 찾아 “새로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높고 처음 하는 프로젝트를 맡아 걱정돼 잠도 잘 안 오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호소했다. 적응장애와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지 4일 만에 정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구지법은 2014년 “사격통제반으로 이동한 뒤 평소 다뤄보지 않았고 관련 지식도 없는 업무를 맡아 많은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됐다”며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뒤집고 업무상 재해라고 판단했다.

■ 조건·상황 고려 없는 ‘성과주의’ 통신 분야에서만 일했던 이아무개씨는 2010년 아이피티브이(IPTV) 사업부장을 맡게 됐다. 부서를 옮긴 직후부터 영업손실이 발생한데다, 2012년에는 시장점유율이 하락하자 이씨는 모든 게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분위기 속에서 ‘매출 증대’ 압박에 시달렸다. 이씨는 2012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서울행정법원은 2015년 8월 “이씨가 아이피티브이 사업에 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회사 중점 사업의 매출 증대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있었고, 판매 부진이 계속되면 지위를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추단된다”고 판단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은 오랫동안 해온 익숙한 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 생명보험사 지점장이었던 전아무개씨는 일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목표 대비 실적을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2013년 1~3월까지 영업실적이 27% 하락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전씨는 2013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증권영업 등을 담당하던 서아무개씨도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고객 투자금에서 51억원의 손실이 생기자 “죽음으로 죗값을 대신하겠다”며 2011년 8월 세상을 등졌다. 기자였던 강아무개씨는 입사 19년 만에 처음으로 사회부로 인사 이동되자 정신적 스트레스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강씨는 부서를 옮겼지만 우울증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4대강 특집 기획기사를 준비하다 2011년 9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20년 기자생활을 한 사람으로서 스트레스는 인정되지만 사망으로 이어질 만큼의 부담은 아니다”라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2014년 11월 “4대강 특집 기획제작을 맡게 되면서 평소의 2배 되는 분량의 일을 소화해내기 위하여 심적 고통이 가중되었고 성과물을 내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감이 예전보다 심했을 것”이라며 판단을 뒤집었다.

■ ‘해고’는 살인이었다 2009년 정리해고 뒤 숨진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28명에 이르면서 “해고는 살인”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진 적이 있었다. 고려대 김승섭 교수 연구팀의 ‘2015년 함께 살자 희망연구’를 보면 ‘지난 1년간 우울 및 불안 장애 경험’이 있는 쌍용차 해고자 비율(75.2%)은 자동차공장 노동자(1.6%)의 47배에 이르렀다.

해조류 가공식품 업체에서 일하던 박아무개씨는 회사와 갈등을 빚다 2013년 3월 해고 통보를 받자 자살을 택했다. 회사 사장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직원들의 근무를 관리했고, 사장의 잦은 질책에 일부 직원들이 출근을 거부하며 반발했다. 사장은 박씨가 주도했다고 보고 박씨와 동료들을 해고했다. 광주고법은 2015년 “자신이 해고를 당하였다는 정신적 충격 외에 자신 때문에 동료들까지 해고를 당했다는 자책감까지 더해져 감내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며 박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해고의 상처는 복직이 된 뒤에도 쉽게 아물지 않았다. 학교 비정규직 조리사인 신아무개씨는 2007년 1월 정규직 조리사가 자신이 일하는 학교로 발령받자 해고됐다. 4개월 만인 같은 해 5월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으로 신씨는 학교로 돌아왔지만, 급성스트레스 반응 등으로 정신과를 찾기 시작했다. 광주고법은 2011년 “갑자기 해고를 당하게 되었고 복직할 때까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일상적으로 고용 불안을 겪는 비정규직은 특히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파견노동자인 서아무개씨는 2003년 한 공장에 파견돼 컴퓨터 관리 업무 등을 맡았는데 파견업체와 공장의 계약이 종결되며 2006년 5월부터 실직 위기를 맞았다.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1년, 3개월 단위로 쪼개기 계약을 맺었던 서씨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하라고 하는데 계속 다닐 수 있겠냐”고 속상해하며 술을 많이 마셨다. 서울행정법원은 2011년 서씨의 자살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면서 “고용 불안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감 등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열악한 환경’도 정신질환 위험 요소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특정 직업군의 스트레스도 높게 나타났다. 2003년부터 서울도시철도(지하철 5~8호선)에서 기관사 9명이 자살로 숨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하철 기관사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진 게 대표적 사례다.

서울도시철도 5호선을 운행하던 이아무개씨는 2013년 3월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5호선은 모든 구간이 지하로 분진 농도가 높은데도 환기가 어려웠고, 당시 9조5교대라는 근무형태도 일반인의 생활 패턴과는 크게 달랐다. 법원은 “열악한 근무환경은 의학적으로 정신질환의 발병 또는 악화에 일부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메트로 기관사인 김아무개씨도 2007년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 김씨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며 “기관사로 고속운행에 대한 불안감, 정확한 시간에 출발과 하차를 반복하여야 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 운행 지연으로 인한 경위서 제출과 승객 항의 등으로 지속적인 정신적·심리적 스트레스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김씨 판결문은 일반적인 지하철 기관사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짚었다. 재판부는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고를 경험한 기관사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공황장애 발병률이 그렇지 않은 기관사보다 훨씬 높고, 동일 업무를 하는 지하철 기관사들 상당수가 공황장애를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관사들뿐 아니라 최근엔 감정노동자들의 정신건강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스트레스에 노출되기 쉬운 업무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노동자들의 정신질환 예방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동희 노무사는 “직무 스트레스 검진 제도 등을 도입해 노동자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살펴야 자살이나 정신질환 등을 예방할 수 있다. 사업주와 정부가 노동자 정신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도 구체적으로 반영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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