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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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세계라면 가장 좋은 영화에 가장 많은 관객이 들 것이다. 논리적인 세계라면 가장 재미있는 영화에 가장 많은 관객이 들 것이다. 여기서 ‘좋은’과 ‘재미있는’은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따질 필요가 있을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우리가 이상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끄럽고 장황한 증거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악담 능력의 한계를 실험해보고 싶은 평론가들에게나 의미가 있다. 완성된 영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고 지루해 빠졌는데 150분이나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멀티플렉스관 절반을 점유하고 있고 사람들은 형편없는 입소문에도 그 영화를 보러 가고 돈도 꽤 벌어들인다.
어떻게 이런 영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영화에 참여한 수많은 각본가는 이 프랜차이즈 밖에서는 멀쩡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블랙호크 다운>, <아이언 맨>, <뷰티풀 마인드>는 모두 이 각본가들이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에 묶여 있지 않았던 당시 만들었던 작품들이다. 그들이 좋은 작품만 썼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때만큼 나빴던 적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그들은 이 영화에서 자신의 평판과 경력을 까먹으려고 작정한 것 같은 대사와 설정만 골라서 쓴다. 앤서니 홉킨스와 같은 멀쩡한 배우가 그들이 뱉어낸 엉터리 대사들을 읊고 있는 걸 보면 그냥 고통스럽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영화가 모든 면에서 더 가치 있는 영화들을 밀어내고 돈까지 벌어들이는 이 어이없는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 탓을 하는 것은 좀 미안한 일이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면 더 좋은 영화는 아니더라도 관객들에게 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를 위한 퀄리티 컨트롤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걸 할 필요가 없었다. 거대 로봇들이 영화 내내 싸운다는 프랜차이즈 약속만으로도 돈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자신감은 마이클 베이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문제는 베이의 예술혼이 점점 우리가 아는 영화의 가치와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의 작업에는 이야기의 재미, 서스펜스,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스펙터클인데, 베이는 이 스펙터클의 질에는 관심이 없다. 남은 것은 양과 강도이다. 더 크고 더 시끄럽고 더 난폭한. 이에 대한 베이의 집착은 병적인 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아이맥스 화면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야가 꽉 차는 그 그림에서 제대로 된 화면 구성이 눈에 들어오던가? 영화는 가끔 1:1.9와 1:2.35의 화면비를 오가는데 그 변화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던가? 들어온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지 보이던가?
영화관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양적 확대에 집중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사에 처음 있었던 일도 아니고. 하지만 최소한의 기본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확대라는 두 글자에만 집착한다면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와 같은 괴물이 태어난다. 베이의 신작은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었지만 무책임하게 방치된 환경 속에서 발생한 병이다.
듀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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