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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시선 2035] 너무 순진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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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노진호 문화부 기자


샘 멘데스의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주인공 번햄은 딸의 친구 안젤라에게 욕정을 느낀다. 허언증이 있던 안젤라는 자신이 얼마나 성 경험이 많은지 은연중에 드러내고 둘은 섹스 직전까지 간다. 하지만 “처음이라 서툴 수 있다”는 안젤라의 말에 번햄은 욕정을 거둔다.

대학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친구들과 이 영화의 주제가 뭘까 얘기하던 중 한 친구가 “왜 번햄은 안젤라와 섹스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나는 “티 없는 순수함을 계속해서 지켜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리고 순간 움찔했다. 나도 모르게 ‘처녀성’을 순수, 혹은 깨끗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녀성이 순수라면, 그 반대는 불순(不純)이고 더러운 게 된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폭력적이었다. “그럴 수 있겠네”라며 넘어갔던 친구들의 반응과는 별개로 그날은 내게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최근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서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소설 속 김지영은 스토킹 피해를 봤는데도 ‘네가 처신을 잘해야 한다’고 꾸중을 듣고, 육아를 위해 많은 걸 포기했음에도 유모차 끌고 나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신다는 이유로 ‘맘충(엄마+벌레)’ 소리를 들었다. 뒤늦게 소설을 접하고선 억울했다. 상황을 과장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든다 싶었다. 특히 주인공 김지영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압박받는 데에선 ‘요새가 어느 시댄데’라며 분노했다.

그런데 ‘여자 사람 친구’들 반응은 달랐다. 소설이 아니라 ‘취재’라 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김지영이 겪은 일을 다 겪어봤다는 이도 있었다. 이 괴리감은 86년생 남자인 내가 얼마나 순진하게 한국에서 살아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7년 가까이 기자로 지내며 숱한 성폭력 사건을 취재했지만 그건 사건이었지 일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소설을 접한 주위 반응은 이 같은 폭력이 일상에 존재한다고 증명했다.

조금만 둘러봐도 ‘폭력’은 정말 계속 되고 있고, 심지어 노골적이다. 책 『남자 마음 설명서』에서 말하기도 저급한 내용으로 여성을 비하한 탁현민씨가 청와대 행정관에 발탁됐다. 배우 문성근씨는 ‘말랑말랑한 뇌’를 언급하며 탁씨를 응원하기까지 했다. 탁씨는 “과거의 일에 깊이 사과하고 반성한다”며 넘어가려 했지만 데자뷔일까. 앞서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돼지발정제 논란 때 했던 얘기와 판박이다.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하다. 으레 그렇듯 “요즘 같이 남자가 여자 눈치 보며 사는 시대가 어디 있느냐”는 반발부터 나올 게다. 그 생각이 폭력이라는 걸 깨닫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일상 속 폭력을 하나씩 걷어내다 보면 지난해 태어난 내 아들 ‘16년생 보듬이’는 부끄러움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노진호 문화부 기자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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