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답례품이 쌀이다. 활동영역이 농촌·농업 영역이다 보니 모자란 강의비나 원고료를 대신 채우는 용도이기도 하고, 연말에 서로 면구스러운 마음을 채우는 것도 쌀이다. 가능한 한 집에서 밥을 해 먹으려 애는 쓰지만 식구들은 적고 간식거리는 지천에 널려 있으니 일 년에 쌀 한 가마니 먹는 일은 난공불락이다. 집과 학교(급식) 밖을 벗어나면 ‘밥심’의 세계를 벗어나 살아가는 시절인지라 쌀은 이래저래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음식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가장 마음이 무거운 일은 밥을 버리는 일이다. 밥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경고는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쌀이 어쩌다 이리 흔해졌는지 사연은 길지만 한국 농업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꼽으면 단연코 쌀이다. 급작스럽게 다가온 대선에서 각 당의 5명 대선후보 모두 농업정책의 1순위로 쌀 문제를 꼽았다. 농업·농촌 문제는 워낙 중첩적이다. 따지고 들자면 일제강점기부터 군사 독재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농업 문제는 곧 쌀의 문제로 모아진다. 쌀은 단순히 식량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먹거리 문제의 핵심이고 민족의 정체성 문제다. 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모든 정권이 갖는 고충이기도 했다. 워낙 강한 상징성이 있다 보니 그 거친 수입개방의 물결에서도 최후까지 버텨본 농산물이 쌀이기도 하다. 쌀은 곧 농촌이자 농민 자신이었으므로.
쌀 한 가마니에 23만원을 보장하겠다던 박근혜 정부는 약속을 지키라며, 서울로 올라와 구호를 외치던 전남 보성군의 촌로, 고 백남기 농민이 차가운 병상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한 농민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각성으로 광화문의 촛불이 댕겨졌다. 이렇게 시민 스스로 쟁취한 5월9일 장미대선은 느닷없지만 공화국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취임 직후인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높게 치솟아 있다. 소위 ‘허니문’ 기간이라고는 하지만 문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졌든 아니었든 현재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은 ‘파격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인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대세론’이 굳어지면서 과반 득표율이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았던 대선 전날인 5월8일. 온 시선이 대통령 선거에 몰려 있을 때, 농림축산식품부는 본연의(?)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농식품부 산하 기관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대선 전날 갑작스레 저율관세할당(TRQ) 밥쌀용 수입쌀 2차분 2만5000t을 구매하는 입찰공고를 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5월16일 구매 입찰이 이루어졌다. 이유야 어찌 됐든 문재인 정부가 밥쌀용 수입의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연말까지만 처리해도 되는 문제였고 가급적 협상의 여지를 다시 가져가도 시원찮을 판에 밥쌀용 수입에 속수무책 당해버렸다. 경제와 안보가 시급한 나라이니 그까짓 농업 문제야 늘 뒷전이어서였을까. 박근혜 정권 말기에 해임안까지 건의되었던 현 김재수 농식품부 장관의 뚝심으로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분노의 족적을 하나 남긴 셈이다. 하여 새 정부의 첫 일인 시위의 주인공은 늘 전문 시위꾼으로 내몰리는 농민이 되었고 말이다. 시대와 불화를 하는 자는 과연 농민일까, 아니면 대한민국 정부일까. 이 물음에 답할 자는 과연 누구인지 언제나 묘연하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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