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해골섬이라 불리는 밀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킹콩. 젊은 시절에는 싸움보다는 타협을 선호했다. 다른 육식동물처럼 주린 배를 채우면 그만이라고 자위하던 무탈한 세월이었다. 하지만 밀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건 아니었다. 약육강식의 현실이 킹콩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싸움을 시작했다. 매일 근육질의 괴수와 사투를 벌였다. 킹콩은 힘없는 동물들의 수호천사로 거듭나면서 ‘틀린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 조금씩 킹콩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킹콩은 티라노사우루스를 누르고 밀림의 왕으로 등극했다. 수많은 생명체가 젊고 의욕에 넘치는 왕의 출현을 반겼다.
킹콩은 이렇게 외쳤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한다고.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해야 한다고.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자가 성공하는 세상으로 나아가자고. 지지율 2%에서 시작한 경선에서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둔 킹콩. 그는 스스로가 최고의 승부사라고 확신했다. 킹콩은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튀는 백병전을 마친 노회한 장수처럼 취임연설을 마쳤다.
일년 후, 킹콩을 왕으로 추대했던 맘모스당에서 반기를 든다. 킹콩을 보좌하던 고릴라당이 맘모스당을 변방으로 몰아내기 시작한 거다. 386세대가 주축인 열린 고릴라당은 왕의 정치철학을 구현하려고 동분서주한다.
킹콩은 민주화를 완성하기엔 여러가지로 준비가 부족했다. 밀림의 소식통이던 까마귀는 킹콩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편집하여 흑색선전의 도구로 악용한다. 까마귀의 공격이 거듭될수록 킹콩의 맷집은 약해졌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왕의 자리가 얼마나 치열한 소통과 협치와 노력이 필요한 공간인지를. 정상에 오르는 순간부터 조금씩 내려가야 하는 외길인생임을. 변덕스럽고도 잔인한 여론의 민얼굴을. 시간이 흘렀다. 킹콩의 지지율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측근의 권력형 비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던 소박한 꿈은 레임덕에 걸려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리 돌파구를 고민해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밀림은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사시사철 먹잇감을 대주는 재주를 가진 왕을 원했다. 킹콩은 왕좌를 떠나 두 번째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재임 기간에 권위주의 타파를 몸소 실천했지만 킹콩은 대중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진다. 고향으로 돌아가 책을 쓰고,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아름다운 말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킹콩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려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킹콩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
까마귀떼의 감시로 집 마당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지인들이 차례로 심판대로 끌려나갔다. 괴롭고 미안했다. 자신의 눈물만으로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기형도의 시처럼 그는 늘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이 몰려왔다.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마지막 글을 남겼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고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킹콩 주변에서 맴돌던 까마귀떼는 또 다른 왕에게로 몰려갔다. 여왕의 실정과 추락을 훔쳐보면서 늘 경계인으로만 기생하는 비겁한 스스로를 회피했다.
8년이 흘러서야 킹콩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모두가 깨달았다. 역사란 전략과 정책이 아닌 인간의 꿈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비록 늦었지만 역사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렇게 킹콩의 눈물은 민주주의 역사의 이정표로 남는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나쁜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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