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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플라톤도 공자도 독재·차별 편들면 ‘인문’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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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인문학의 거짓말’ 펴낸 박홍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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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2월 정년을 맞는 박홍규 교수는 지금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부부가 쓴 책 <산업민주주의>(1897년)를 번역하고 있다고 했다. 출판사 아카넷과 계약을 맺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오리엔탈리즘>처럼 꼭 번역이 필요한 책인데도 아무도 하지 않아 직접 나서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나키즘 사상 뿌리로 중학생 때 간디 전기를 읽고 감명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도 간디와 톨스토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박홍규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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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65)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가 최근 펴낸 <인문학의 거짓말> 표지를 보니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상 상반신에 큼직한 빨간색 가위표가 쳐져 있다. 소크라테스만이 아니다. 그는 책에서 동서양 고전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공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철저히 비판했다. 2500년 전이라고 하더라도 독재와 차별, 제국주의 편이었다면 그걸 인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고전이라면 무조건 권위를 부여하는 우리 학계 풍토를 ‘고전 독재’ ‘고전 제국주의’란 말을 써가며 성토했다. 지난 24일 전화로 박 교수를 만났다.

그는 아나키즘 신봉자다.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회원이 아니다. 일부 회원들의 ‘우편향 행보’가 못마땅해 탈퇴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정치뿐 아니라 모든 영역의 조직, 권력, 지배를 부정한다. 박 교수가 내세우는 자유-자치-자연, 이른바 ‘3자주의’도 그런 관점에 터 잡고 있다. 그는 “독재 없는 세상이 나의 반세기 꿈”이었다고 썼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써내기 시작한 여러 책에서 동서양 고전들을 ‘3자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플라톤 다시 보기>에선 반민주주의자 플라톤을 도마에 올렸고,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선 ‘무욕의 자유인’ 디오게네스를 노예제를 긍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대비시켜 재조명했다. 그가 보기에 ‘3자주의’에 가장 근접한 사상가는 부처와 묵자, 디오게네스, 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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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석은 사상가에 그치지 않는다. ‘알렉산더 왕과 로마의 케사르는 세계 최대의 살인자이며,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사건은 인류 최초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이다. 세계 최초의 민주국가는 그리스가 아니라 인도이다. 서양 학자들이 고대의 인도 민주정을 서술하지 않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독일 철학자 니체를 예로 들었다. “니체 책엔 민주주의를 극단적으로 경멸하는 말이 수시로 나와요. 니체의 초인 개념도 독재와 연관성이 있죠. 하지만 우리 학자들은 이런 점을 인용하지 않아요. 다른 나라엔 이런 관점의 책이 많아요. 우리는 이런 책들이 번역되지도 않아요.”

박 교수는 “니체의 반민주적 요소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가 그만큼 위기에 있다는 걸 알려준다”고도 했다. “권위주의적 고전읽기가 판치는 것은 반민주적 지적 풍토와 관련 있지요. 유신 때 유명 정치학자들이 박정희를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가에 비유했어요. 플라톤의 권위를 빌려 독재자를 미화했죠. 이는 조선 유학자들이 공자와 맹자를 끌어와 왕도정치를 미화한 것과 똑같아요.” 철인왕을 꿈꾼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의 지배를 바랐다. “독일 히틀러 시대나 영국 제국주의 절정기인 빅토리아 왕조 때 플라톤이 가장 조명을 받았어요. 우리도 박정희 때 플라톤 책 <국가>를 염가본으로 수만권 찍었죠.”

‘소크라테스에 가위표’ 도발적 표지
‘고전’ 무조건 권위부여는 반민주적
박정희 유신때 플라톤 예찬 대표적
“독재없는 세상 꿈꿔온 아나키스트”


‘진보서 보수로’ 부친 굴절 반면교사
1991년 번역 ‘오리엔탈리즘’ 자부심


고전에 무조건 권위를 부여하는 지적 권위주의가 득세하는 데는 대학에 몸담은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비판적 지식의 축적입니다. 지금 대학은 외국 지식을 급속히 빨아들이는 데만 급급해요. 비판적 기능이 거의 없어졌어요.”

아나키스트 박 교수의 눈에 지난 10년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과 180도 반대의 길로 간 시간이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개인의 자유나 자치 확장과 정반대로 갔어요. 국가 권위주의가 노골적으로 강화되었죠. 저는 예전부터 교육부 해체 이야기를 했는데, 국정교과서를 만들었잖아요. 자유가 기본인 문화·예술을 권력으로 옭아매려 했고, 표현의 자유나 노동권 보장에도 문제가 많았어요.”

문재인 정부 출범을 두고는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숨통이 트인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문 대통령이 공약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하지 않거나 사드 문제에 소극적 태도를 취한 것은 비판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는 책에서 아버지와 겪은 갈등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몇 해 전 고인이 된 아버지는 4·19 때 교원노조 활동을 하다 5·16 쿠데타 뒤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엔 구미초교, 대구사범 선배인 ‘박정희 예찬론자’가 됐다. 4형제 중 장남인 박 교수는 유교적 가치관에 철저하고 정치적 보수인 아버지가 싫었다. 그가 지금도 외관에 신경 쓰지 않고 관혼상제나 동창회를 거부하는 데는 이런 반감이 작용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저에게 큰 짐이었어요.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점이 열등감이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도 컸어요.” 중학생 때 아버지의 책 보따리를 열어본 기억이 생생하다. “해방 정국 때 출판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관련 책이 많이 쏟아졌어요. 중요한 책들이었죠. 30대까지는 진보적 생각을 갖고 계시다 그 뒤에 엄청난 굴절이 있었어요. 대구·경북 지역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 지역도 4·19 전까진 진보적이었어요. 아버지처럼 굴절된 삶을 살아선 안 되겠다고 결심했죠.”

그는 20년 전 농촌마을인 경북 경산시 압량면 당음리로 이사했다. 아내와 함께 300평가량 밭농사를 짓고 있다. 출근 전후 1시간씩 농사일을 한다. 휴대전화와 운전면허는 가져본 적이 없고 점심은 늘 도시락이다. 17년 동안 자전거로 출퇴근하다 3년 전부터는 산길로 1시간쯤 걸어서 학교를 간다. “길에 중앙선을 긋더니 갑자기 차가 많아졌어요. 너무 위험해 걸어다닙니다.” 동창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인간관계를 통해 보수적 태도가 형성됩니다. 그런 모습이 보여 동창회에 발길을 끊었어요.”

수십권의 저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물었다. 뜻밖에 번역서를 꼽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오리엔탈리즘>을 91년에 번역했죠. 그때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어요. 그 책 이후로 사람들이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을 편하게 쓰고 있어요. 자부심을 느낍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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