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9 (화)

<디테일추적>서양인들이 아스팔트 물구덩이에 대처하는 방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해마다 날이 뜨끈해지고 장마 기운이 돌 때 즈음이면, 비구름과 함께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도로 위의 함정 ‘포트홀(Pothole)’이다.

포트홀이란 길에 깔린 아스팔트 표면이 파손돼 생긴 냄비(pot)같은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른 아스팔트는 스펀지처럼 차량 무게에서 오는 충격을 잘 흡수하지만, 물을 먹으면 이 효과가 줄며 차체 하중이 아스팔트에 거의 온전히 전달된다. 누르는 힘이 세게 걸리니, 균열이 쉽게 생기고 빠르게 커진다. 땅이 젖는 시기면 포트홀이 흔히 생겨나는 이유다.

달리던 자동차 바퀴가 포트홀에 걸리면 차축이나 타이어에 손상이 오는 건 물론, 심하면 차가 다른 차선이나 길 밖으로 튕겨나가기까지 한다. 이처럼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장애물인 만큼 눈에 띄는 대로 곧장 보수해야 옳을 게다. 하지만 세상 일이 대개 그렇듯, 담당 기관 일손은 항상 모자라니 신고 들어간 포트홀이 오래도록 방치되는 일도 적잖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가 유달리 미개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세상 어디건 공무원 일손에 여유가 있는 나라는 그리 흔치 않다. 이 때문에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도 포트홀이 내버려진 꼴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시민이 대처하는 방식은 차이가 좀 난다. 세게 나간다는 게 지자체 항의방문이나 언론 제보 정도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쾌한 서구 형님들께서는 훨씬 공격적이고 버라이어티한 방법으로 공무원을 압박한다.

#포트홀에 뜬 플라밍고

지난 23일, 러시아 사라토프시에 사는 모델 안나 모스크비체바씨가 물이 찬 포트홀에 플라밍고 튜브를 띄우고 올라탄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조선일보

물웅덩이에서 화보를 찍은 안나 모스크비체바씨./조선일보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이모가 사는 미르니시에서 수영복 촬영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 앞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포트홀이 방치된 걸 보고 분노해, 이를 고발하려 포트홀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한다. 집 앞뿐 아니라 여러 지역을 돌며 사진을 찍었고, 최근엔 애초 촬영 목적지였던 미르니시에서도 포트홀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조선일보

화보를 찍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안나 모스크비체바씨/조선일보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 길은 1년 내내 얼고 녹으며 질척이는 통에 제 구실을 못하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독소전쟁 당시 국토를 뒤덮은 진창길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로 히틀러 진격까지 막아낸 나라다. 자연히 다수 국민이 걸레짝 같은 길바닥 꼴에 불편을 느끼고 있었고, 이 때문에 포트홀 실태를 고발한 안나 사진은 인기를 얻어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많은 이들이 안나가 사진 찍는 현장을 따라다니는 것은 물론, 지역 방송국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한다.

#크고 아름다운 XX

지난 2015년 봄, 영국 맨체스터시(市) 포트홀 보수 작업은 다른 해보다 한층 더 분주했다. 포트홀이 팬 곳마다 나타나 스프레이로 크고 아름다운 성기를 그려대는 괴한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영국 맨체스터주 등지에 그려진 성기 모양의 낙서./조선일보DB


자신을 ‘왱시(Wanksy)’라 칭한 이 익명의 예술인은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를 통해 “자전거 선수인 친구가 도로에 패인 구멍에 심하게 다쳐서, 포트홀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이러한 작업을 한다”고 전했다. 한동안 공무원뿐 아니라 출근하는 시민 역시 아침마다 못 볼 꼴을 봐야 했지만, 어쨌든 효과는 있어서 그림 그려진 구멍 대부분이 보수공사를 받았다 한다.
조선일보

보수작업을 마친 포트홀./인터넷 캡쳐


여담으로 이 ‘왱시’라는 양반은 제법 괴도 자질을 타고났는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분탕을 치고 다녔음에도 결국 경찰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다. 몇 달 후 서리주 페첨시 차도에서도 성기 낙서가 발견됐지만, 왱시와 그림체가 달라 당국에서는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 저지른 짓으로 보고 있다 한다.

#길 위의 화분
물론 색목인 전부가 기이하고 해괴한 행동만으로 포트홀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건 아니다. 지난달 18일(현지 시각) 영국 데일리메일 등 외신은 잉글랜드 서머싯 카운티 배스(Bath)시 도로 곳곳 포트홀에 일부 주민들이 꽃을 심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사람들 눈에 띄게 밝은 색 꽃을 심어, 도로 한가운데에 포트홀이 있음을 알렸다 한다.
꽃은 심은 주민들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포트홀 위험성을 알리고 당국 관계자들의 대응을 재촉하려 벌인 일이라 밝혔다. 배스시 당국도 이에 부응해, 정부로부터 포트홀 수리 예산으로 440만 파운드(약 63억8200만원)를 승인받았다. 배스시 하원의원 벤 호울렛은 “포트홀은 운전자들에게 늘 위험한 요소”라며 “이번 예산 마련은 주민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문현웅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