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봉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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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전망 좋은 곳에 올라 바라보는 것이다. 서울을 눈에 넣는 그 시간만큼은 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600여년 역사의 수도 서울, 600년도 넘게 쌓인 세월의 단층을 밟고 살아가는 지금, 화석처럼 박힌 이야기가 꿈틀 살아서 눈앞에 펼쳐진다.
그 첫번째는 안산 봉수대와 주변 이야기다. 서울시 서대문구 안산 봉수대에 올라 서울을 바라본다. 안산 동쪽에는 서대문역사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봉원사가 있다. 서대문역사공원을 돌아보고 안산 봉수대로 올라갔다가 봉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한나절 길이다.
안산 봉수대에서 본 풍경. 인왕산, 북한산, 무악재 넘어 은평구와 고양시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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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봉수대에 올라
서대문구 안산(295.9m)에 봉수대가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동봉수대와 서봉수대 두개였다. 지금 있는 봉수대는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복원한 것이다. 현재 봉수대가 있는 곳은 조선 시대 동봉수대 터다.
조선 시대 전국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모이는 곳이 남산 봉수대였다. 남산에는 5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안산 동봉수대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순으로 올라온 봉수를 남산 봉수대로 전하는 마지막 봉수대였다.
안산 봉수대에 오르면 속 시원하게 시야가 터진다. 남쪽의 관악산 줄기, 동남쪽의 남산, 동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한산 줄기, 멀리 아차산과 청계산도 보인다. 남산과 관악산 사이로 한강이 흐른다. 남산, 낙산, 북악산, 인왕산을 잇는 조선 시대 한양도성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문 곳은 인왕산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 ‘인왕제색도’에서 볼 수 있는 인왕산 풍경의 뒤편이다. 불거진 근육 같은 바위 절벽의 위용이 대단하다. 인왕산 능선을 타고 내려와 남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조선 시대 한양도성 성곽이 눈길을 붙잡는다. 성곽 밖 선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양도성의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인왕산에 있는 인왕사를 도성 안에 두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이성계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줘 한양도성은 지금의 경계로 정해진 것이다. 선바위는 승복을 입은 수도승의 모습을 닮은 커다란 바위인데, 인왕사 부근에 있다.
독립문 옆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도 보인다. 광복과 민주화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무악재가 보인다. 조선 시대 무악재를 넘어온 중국 사신을 모화관에서 맞이했다. 지금은 모화관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 독립문 앞에 남아 있다.
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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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역사 앞에 서다
안산 봉수대로 오르는 여러 길 중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안산 봉수대로 오르기 전에 서대문독립공원의 독립관, 독립문, 영은문 주초,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돌아본다.
독립관은 본디 중국 사신을 영접할 목적으로 1407년(태종7년)에 지은 모화관이었다. 현재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선 말 독립협회에서 독립관으로 사용했다. 독립문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있다. 한글로 ‘독립문’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영은문 주초는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다. 서재필은 영은문을 없애고 독립문을 세울 것을 주장했고, 그의 뜻대로 독립문을 세웠다. 영은문은 초석만 남았다. 1979년 성산대로를 만들면서 독립문과 함께 지금 자리로 옮겼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1908년에 일제에 의해 지은 경성감옥이었다. 이후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 애국 시민과 학생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 서울형무소, 1961년에 서울교도소, 1967년에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민주화를 위해 앞장선 사람들이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곳이다.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문을 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시관에서는 일제 강점기 만행적인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알 수 있으며, 해방 이후 민주화에 앞장섰던 사람들과 그들을 탄압했던 독재정권의 실태를 볼 수 있다.
소설가 심훈과 김광섭, 한용운 등은 옥중생활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전시관에 전시된 김광섭의 <나의 옥창일기>에 ‘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중략)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 벌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항문이나 입에 감춘 것이 있나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심훈이 쓴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의 일부도 볼 수 있다. 한여름이면 똥통이 끓고 빈대와 벼룩에 살을 뜯기고 쪼그려 앉아 잠도 못 자는 생지옥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곳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의 눈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형장 건물 옆에 있는 미루나무. 사형장 건립 당시인 1923년에 심었다.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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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한쪽 모퉁이에 미루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1923년 사형장을 만들면서 심은 나무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형장으로 가던 독립투사의 한 맺힌 울음을 함께했던 나무다. 그래서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봉원사에 있는 아소정 건물. 아소정에 있던 건물 부재들을 그대로 옮겨 지었다. 문틀, 마루 등이 다 옛 건물 부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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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와 아소정 그리고 정도전의 편액
안산 봉수대 서쪽에는 봉원사가 있다.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 있는 건물에서 절에 계신 할아버지 한분을 만났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눈 건물이 조선 말 흥선 대원군이 살았던 별장, 아소정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복 과정에서 봉원사의 대웅전이 불타 없어졌다. 그래서 염리동에 있는 아소정 건물의 부재를 사서 그대로 옮겨 짓고 법당으로 사용했다. 기둥, 서까래, 보, 문틀, 마루, 편액 등은 대원군이 살았던 당시의 것 그대로다. 아소정은 현재 염리동 동도중학교와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교정 한쪽에 있었다.
봉원사 명부전 편액은 정도전의 글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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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에는 이성계와 함께 조선 시대의 문을 연 삼봉 정도전의 글씨도 남아 있다. 명부전 편액을 삼봉 정도전이 썼다. 이성계는 부인 신덕왕후가 죽자 흥천사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 당시에 지장보살을 모실 명부전을 짓도록 했는데, 그 편액을 삼봉 정도전에게 쓰게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에 오르자 신덕왕후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왕비의 제례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이방원에게 신덕왕후는 계모였다. 세월이 흘러 신덕왕후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었다.
1669년(현종10년)에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하면서 원찰을 세워 이름을 신흥사라 했다. 1794년(정조18년)에 현재의 돈암동으로 옮기면서 흥천사가 됐다. 이때 명부전 건물은 봉원사로 옮겨 지으면서 천불전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명부전 건물을 지으면서 삼봉 정도전이 쓴 편액을 걸게 되었다. 편액의 왼쪽 상단에 ‘鄭道傳筆’(정도전필)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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