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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전화 앞에서 제보를 기다리는, 그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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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이 대사 그 장면/ 언론인 그린 영화들

휴대폰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고충은 더욱 커졌다. 고전 소설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정보’와 ‘거리’다. ‘누가 어떤 정보를 알고 있는가,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하며, 거리는 얼마나 먼가.’ 그런 이유로, 소설가는 사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주인공을 데려다 놓기도 한다.

휴대폰 때문에 모든 게 망했다. 주인공들에게 휴대폰을 쥐여주고 싶은 소설가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휴대폰이 정체 모를 전파를 받은 후 수신자를 좀비로 만들어 버리는 ‘셀’ 같은 소설을 쓰는 스티븐 킹은 제외해야겠다). 주인공은 중요한 정보를 가장 늦게 알아야 하고, 힘들게 알아야 한다. 휴대폰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직접 들어야 한다. 휴대폰 때문에 주인공을 속이기 힘들어졌다. 소설의 허점을 발견한 독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냥 휴대폰으로 연락하면 되는 거 아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이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글을 쓴다는 공통점 말고는 소설가와 하나도 닮은 게 없는 것 같은 기자들에게 휴대폰은 축복에 가까운 도구일 것이다. 수년 전 신문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기자들에게 전화기가 얼마나 중요한 도구인지 새삼 알게 됐다. 취재원과의 전화 통화는 물론 전화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휴대폰으로 기사를 직접 불러주기도 하고, 전화기를 녹음기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휴대폰이 없으면 일을 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지금은 휴대폰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지 않았을까.
한국일보

영화 '대통령의 음모'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퇴진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을 추적 보도한 기자들의 활약을 스크린에 불러낸다.


소설가가 주인공과 정보의 거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려 한다면, 기자들은 멀리 있는 정보를 최대한 빨리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다. 전화는 거리를 단축시켜주고, 정보를 압축해주며,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같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기자들을 다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이 전화기인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 사건에 대해 제보를 하려면 전화를 걸어야 한다. 취재를 하려면 전화를 걸어야 한다. 기자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음모’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대사는 “나 없는 동안 전화 좀 받아 줄래요?”다. 1972년에 있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하는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와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먼)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1976년에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의 휴대폰이 1973년에 만들어졌고, 상용화된 것은 1980년대였으니 당연히 영화에 휴대폰은 등장하지 않는다. 휴대폰이 없기 때문에 신문사 내부의 장면이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다. 브로드웨이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조지 젠킨스는 실제 워싱턴 포스트 신문사 내부를 모델로 정교한 세트를 만들었고, 기자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는 것처럼 신문사 내부를 종횡무진 움직인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전화를 받아야 하니까. 큼지막한 제보를 기다려야 하니까.
한국일보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아동 성추행 사제 사건을 파헤치는 탐사보도팀을 통해 저널리즘의 본령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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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9년 후에 만들어진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2002년 가톨릭 교단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폭로한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2년이면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을 때인데도,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전화는 유선전화다. 기자들은 휴대폰을 쓰는 대신 직접 탐문하고, 누군가의 제보를 기다리고, 뛰어다니며 취재를 한다. 기자들끼리 아주 은밀한 정보를 주고받을 때에만 휴대폰을 사용한다. 전화기 쓰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시나리오 작가의 고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소품으로 반드시 등장해야 하지만, 중요한 대사를 휴대폰에게 맡기지는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는 반드시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며 이야기해야 한다. 전화기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던 ‘스포트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아동 성추행 스캔들이 보도된 직후 신문사로 수많은 제보 전화가 걸려 온다. 팀장 윌터가 전화를 받으면서 “스포트라이트 팀입니다”라고 말하며 영화는 끝난다.
한국일보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 '제보자'는 공익 제보와 언론의 끈질긴 비판 정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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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중에서 언론인의 모습을 가장 잘 그려낸 임순례 감독의 ‘제보자’ 역시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끝난다. “네, 어디시라고요? 제보자의 신원은 100% 보장해드리니까 걱정 마시고요.” 언론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딜레마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특성상 주인공은 정보를 가장 늦게 알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주인공이 기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기자는 계속 정보를 뒤쫓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그 지점을 계속 뒤로 미룬다. ‘제보자’의 주인공인 윤민철(박해일) PD는 후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제보가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세상이 이 모양이 됐겠냐.”

기자들은 계속 기다린다. 전화가 오기를, 제보가 오기를, 새로운 정보가 도달하기를. 2017년을 경험한 한국 사람들이라면 기자에 대한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 직업인이었지만,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버텼을,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기다렸을, 그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누군가 전화기 앞에 앉아서 우리들의 제보를,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기자들이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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