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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양해원의 말글 탐험] 영어 간판, 쓸 거면 틀리지나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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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찌개 3000원, 닭곰탕 3000원, 갈비탕 봉사 가격 5000원…. 과연 봉사(奉仕)라 할 만하다. 어? 더 싼 것도 있네. 아욱국 2500원, 선짓국 2000원, '꿀맛 술 한잔이 천원 안주는 공짜'까지. 음식뿐이랴.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 노래 1곡 1000원 단체 손님 환영. 탑골공원 주변답다.

서울시가 일본 도쿄의 스가모 거리를 본떠 꾸몄다는 이곳. 도로 턱, 작은 글씨, 영어가 없어 노인 천국이라는 데랑 견줄 만할까. 일단 영어가 눈에 안 띈다 싶었는데…. 표지판 글씨 '락희 거리' 아래 적혀 있다. 'ELDERLY FRIENDLY STREET.' '노인 친화 거리' 했으면 됐지, 누가 들여다본다고.

근처 그늘에 장기판이 벌어졌다. 공원 울타리 밖으로 고개 내민 노인까지 일고여덟이 앉거니 서거니…. 마침 '쾌적하고 걷기 편한 거리로 만드는 공사' 중이란다. 어법도 틀리는 영문(英文) 챙기는 대신 이런 쉼터 몇 군데라도 만들지.

구시렁대며 종로2가 지하상가로 들어선다. 가게 이름이 난리다. cracker501, BEAUTÉ, French & new york sole, 2me, SPACE A, Roem, Bling Bling#, market8, I Love Flat, miRu, Hellow Blin, line fit…. 통로 천장에 걸린 안내판도 'Spring Collection'이다. 보일세라 귀퉁이에 조그맣게 적은 '종각쇼핑센터'가 애처롭다. 여든 가까운 곳 중 한글 상호(商號)라야 삐에로, 타임월드, 쥬너스, 그리스, 상록수, 샛별 정도…. 개중 '폰껍데기' '들고 메고'에 눈이 번쩍한다. 흔한 말로 하면 '휴대폰 케이스' '핸드백'이었을 터. 이만한 걸 기발하고 기특해하다니, 무덤에 핀 꽃이 더 예쁜가 보다.

왜 이리 딴 세상일까. 외국인이 많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관광객 명소(名所) 명동도 이렇지는 않다. 영문자를 써야 그럴싸해 보인다고들 여겼음 직하다. 이런 부질없는 사대(事大)가 어디 있담. 거리 간판은 물론, 외국어투성이 아파트 이름이 표기까지 영문 천지 될 판이다. 23년 전 일본처럼 우리도 고령(高齡) 사회가 된다는데. 엄니 아버지들 집 못 찾는 일 잦아지면 어쩌나. 걱정도 팔자겠지 설마.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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