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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일사일언] 귀 얇은 남편의 제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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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윤명숙·화가 박서보 아내


우리 부부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제주도 집에 내려와 한 일주일 쉬다 간다.

쉰다니까 바닷가도 어슬렁거리고 올레길도 걷고 여기저기 구경도 하는 줄 알겠지만 공항에 내리기 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고작이다.

제주도 서남단 지역에 예술 종사자 누구에게나 헐값에 땅을 분양한다는 말이 귀 얇은 남편을 제주로 끌어들였다. 첫해는 곰팡이와 싸우느라 몸이 고달팠다. 싸워야 할 적은 곰팡이뿐만이 아니다. 모기는 가히 살인적이다. 제주도 모기는 크고 색깔도 시커멓다. 11월 들어야 극성맞은 모기도 사라지고, 바람도 잦아들고, 하늘이 쾌청하다. 날씨 좋은 날은 새벽 하늘까지도 파랗다.

태양이 구름 위로 떠오르면 보라색 붉은색을 비롯해 갖가지 형태 구름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남편은 집 지으면서 육지에서 공수한 돌확을 마당 한 귀퉁이에 들여놓았다. 세로 2m, 가로 4m이니 상당히 크다. 깊이도 80㎝는 족히 된다.

첫해엔 수련 화분을 서너 개 사다 넣고 물을 가득 채웠는데 겨울에 잘 견디더니 다음 해에 꽃을 피웠다. 마당을 찾아드는 온갖 새들도 잠시 돌확에 앉아 목을 축이고 쉬어간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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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색이 죽나 보다. 지난여름 오일장에서 금붕어 10마리를 사다 돌확에 풀어놓았는데 누렇게 바랜 수련 잎 사이로 악취만 진동한다. 물이 썩어 붕어가 죽었는지 붕어가 죽은 후에 급격히 물이 썩었는지, 어쨌거나 썩은 물을 퍼내는 데 장장 세 시간이나 걸렸다.

구경만 하던 남편은 건져 올린 수련 뿌리를 뒤적이며 멀쩡한 생명을 버린다고 투덜거린다. 나는 심사가 뒤틀려 물 푸던 대야에 수세미를 쓸어 담고 젖은 발을 철푸덕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내년 봄에 수련이 새싹을 밀어올릴지도 모르겠다. 뒷생각 안 하고 공연히 씩씩거렸나? 하긴 죽은 줄 알았던 수련이 살아나면 난들 그 아니 좋은가?



[윤명숙·화가 박서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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