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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화)

문체부 공무원들 고해성소 된 ‘블랙리스트’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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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직원 중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 없었다”

“예술가들 만나는 게 두렵고 창피했다”

법정 증언 통해 줄줄이 부끄러움 고백

공무원의 부당지시 대처에 영향 미칠듯


지난달 27일 오후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들 재판이 열린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311호 형사중법정. 이날도 어김없이 문체부 산하기관 직원의 사과로 공판이 마무리됐다.

증인으로 나온 유아무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콘텐츠진흥팀장은 “공공기관에서 도서 선정 배제에 관여한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며 울먹였다. 앞서 유씨는 좌파 성향 저자를 배제하라는 청와대 지시에 따라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등 9권의 책을 ‘문제 도서’로 선별해 지원 대상 도서에서 제외하게 된 경위를 증언했다.

지난달 6일 첫 정식재판이 열린 뒤부터 ‘블랙리스트’ 법정은 문체부와 산하기관 관계자들의 ‘고해성소’가 되고 있다. 지난달 12일엔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 실무를 맡았던 오아무개 문체부 서기관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문체부 예술국 직원들 중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예술 발전을 위해 공직에 종사하면서도 리스트를 관리해야 한다는 자괴감이 떠나지 않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공연 분야 지원배제 업무를 맡았던 홍아무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부장도 지난달 26일 법정에서 부끄러웠다는 고백을 이어갔다. 그는 “문체부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원배제 업무 이후 예술가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창피하다”고 했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배제가 부당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사상 불이익 등을 우려해 상부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입 모아 말했다.

뒤늦은 눈물을 보인 ‘블랙리스트’ 실무자들은 왜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을까. 특검은 지난 2월 ‘영혼 없는 공무원’에 대한 단죄 의사를 밝히면서도 가담 정도, 자백 여부 등을 고려해 차관급 이상만 기소했다.

법조계에선 ‘블랙리스트’ 실행에 깊숙이 개입한 일부 문체부 공무원들의 경우 부당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지시체계의 말단에 있던 이들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이광철 변호사는 “법적으로 문제 될 수 있는 걸 알고도 실행에 가담했다면 공범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소극적으로 불의에 따르는 등 가담 정도가 적은 이들까지 법정에 세우는 건 법을 너무 형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문체부 공무원 등 상당수가 특검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문체부 공무원 상당수는 내부 고발자로서 특검 수사에 협조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데 기여했다. 이들까지 모두 처벌하는 건 법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관가에선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이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의 대처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지난달 말 <한겨레> 인터뷰에서 후배 공무원들에게 “공무원에게 신분 보장을 해주는 것은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지시받았을 때 따르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해서”라며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느니 차라리 불이익을 받고 한직에 가 있으라”고 조언한 바 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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