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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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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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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감독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평범한 이야기를 비범한 이야기로 변용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만드는 영화라는 소우주는 단순히 현상의 표면만을 훑지 않는다. 늘 그랬다. 언제나 더 나아갔다. 이민 문제에 대한 의견차로 빚어진 부부의 별거와 아내의 유산, 그리고 살인죄 기소('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혼과 재혼을 두고 세 남녀의 일상에 출몰하게 된 진실의 조각들('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파르하디의 영화는 대체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변주였다. 사건이 벌어지고, 인물들은 갈등한다. 두어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며, 고뇌는 한껏 증폭된다. 하지만 어느 한쪽으로도 쉽게 기댈 수가 없다. 오롯이 제 윤리적 판단에만 의지해야 하는데, 선택의 결과가 파국일지 해피앤딩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르하디는 이 난처한 게임에 관객을 줄곧 동참시켰다. 그러고는 물었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테지요?'

'세일즈맨'(5월 11일 개봉)은 그 물음이 한층 집요해진 영화다. 집요하다 함은 주인공이 직면한 윤리적 딜레마가 현실의 우리로서도 좀처럼 빠져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파르하디가 말하듯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닌 선과 선의 갈등이나 불일치에 가까운 영화"여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를 보는 당신은 그가 제안한 게임의 참여자로서 어느 순간 주인공의 상태와 똑같은 내면적 곤경에 놓일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극 무대에 올리는 연극인 부부의 삶에 한 사건이 침범한다. 샤워 중 벨이 울리자 남편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로 착각해 현관문을 열어준 라나(타라네 앨리두스터). 그녀는 정체불명의 사내에 의해 겁탈(이 장면을 실제로 보여주진 않는다)당한다. 파르하디는 그렇게 마치 인간을 시험하는 신처럼, 이 젊은 부부의 삶을 한바탕 파고로 휩쓸어 놓는다.

이후 정신적 고통에 시름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에마드는 분노하고, 복수의 칼을 간다. 그래서 도망친 가해자를 물색하는데, 이 범인은 조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찾아진다. 그러나 딜레마는 이때부터다. 악한으로 생각했던 가해자는 늙고 병든 볼품없는 사내에 불과했다. 변변한 직업 하나 없이 예비 사위의 빵집 배달일을 도와주며 사는 가난한 노인. 어찌해야 할까. 용서하고 넘겨야 할까. 어떻게든 응징해야 할까.

용서와 복수의 갈림길에서 에마드는 방황하다 후자를 택하려 한다. 빈 아파트 실내의 밀폐된 방 안에 노인을 온종일 감금시킨다. 폐쇄공포증이 있다며, 몸이 아프다며 내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노인의 말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런 그의 행위를 물끄러미 지켜보는데, 그 모든 상황이 꽤나 섬뜩하게 그려진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서늘하게 다가오는 아이러니. 다음날 남편을 따라 노인을 보러온 아내는 "가족을 불러 당신의 잘못을 털어놓아야만 용서하겠다"는 남편을 저지하며, 그를 보내주자고 호소한다.

'세일즈맨'은 다르덴 형제의 '아들'과도 얼핏 닮은 영화다. 우리에게 고통을 준 대상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요한 윤리적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아들'이 제 아들을 죽인 소년을 거둬들이려는 남자의 복잡다기한 내면을 응시하며 '용서' 쪽에 좀 더 가닿았다면, '세일즈맨'은 '복수' 쪽을 좀 더 관찰하는 듯하다. 제69회 칸영화제 각본상·남우주연상, 제89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이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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