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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현대미술가 열전] 도발적인 `고백의 여왕` 트레이시 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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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영국 현대미술에서 'YBA(The Young British Artists)'가 활약했던 1990년대는 대략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미술사에서 그 파격적인 영향력과 모멘텀에 대해 매우 특별한 시기로 회자된다. 1988년 촉발한 당시 영국 골드스미스대 미술대 출신 젊은 작가들의 대단히 실험적인 작품들은 문제적이라는 비평과 혁신적이라는 관심을 동시에 받으며 세계 미술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일련의 작가들은 죽은 상어가 부패하지 않도록 포르말린 대형 수조에 박제시켰던 설치작품의 데이미언 허스트, 거침없는 성(性)에 대한 묘사와 이를 편협한 시각으로 한정시키는 기성세대에 영국 특유의 비평적인 유머러스하고 시니컬한 도전을 지속했던 세라 루커스, 그리고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삶의 흔적과 역사(?)가 지워져 있는 침대를 전시장으로 옮겨와 관객들을 당황시켰던 바로 트레이시 에민(54)이 있다.

에민은 당시 센세이셔널한 젊은 여성 작가의 아이콘이자 문제적인 작품으로 언론에서 상당한 논쟁이 있었던 인물이다. 작가가 잠자리를 함께했던 남성들 이름을 수놓은 작품에 그녀의 의붓아버지 이름이 등장했고, 그녀의 지극히 사적이고 치부가 될 수 있는 상처들을 거침없이 회고하며 간증했던 일련의 작업들은 현대미술에서 윤리와 도덕적인 관점이 어느 범위까지 다루어질 수 있는지 환기가 되었던 사례이기도 하다.

근래에 들어 인터넷에 떠도는 가십성 기사 혹은 소모적인 자극성 기사나 댓글들을 접할 때 '여혐' '김치녀' 등 여성 및 여성성에 대한 자극적인 비판과 원색적인 비난의 표현을 보며 적잖이 놀라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얼마 전 예술계 전반의 이슈였던 개인의 입장과 권력을 이용한 성희롱 혹은 성폭행 사건들에 대한 뉴스도 지금 단지 성적 차이에 대한 대립이 아닌 우리 사회 전반에 여성이 지니는 입장, 그 고유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해받고 있는 것인가를 반추하게 된다.

에민의 강렬한 작품들은 앞서 언급한 근래의 현상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한다. 그녀가 묘사한 여성의 누드 혹은 신체에 대한 탐구는 자극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가만 보면 이를 너머 내면의 필연적인 연약함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지점은 여성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지점으로까지 확장시켜서 볼 수 있다.

매일경제

Reversibl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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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그 내면의 가장 연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대개 삶과 죽음과 직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부분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할 때 본인의 연약함이 약점이 되기에 이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두꺼워지며 본래의 타고난 성격과 상관없이 인간을 냉소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필연적인 고통은 오직 회복에 대한 의지로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영국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그녀의 문제적 작품 '데스 마스크'(2002년)를 6만7500만파운드에 소장했다. 이 작품은 에민이 주요하게 다루는 인간 자아의 근본성을 표현하는 조각 작품으로서 소장된 박물관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한다. 에민은 표면적으로 그 작품의 외형이 자극적일지 모르나 동시에 개인의 도전을 통해 이슈에 그치지 않는 지속적인 작품활동으로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삶의 극복 혹은 회복으로의 성찰이 있었다고 본다.

이 때문에 삶과 죽음으로 귀결되는 정체성의 지점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 왔던 관용적인 지점일지라도 그녀 개인의 삶 굴곡이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과정은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마도 영국 사회에서 터부시될 수 있었던 작가지만 그녀의 지난한 분투에 2012년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고, 2007년 52회 베니스비엔날레의 영국관 대표 작가로 에민을 지지하지 않았을까.

[전민경 국제갤러리 대외협력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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