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이정배의 내 인생의 책] 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W. 벤야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실패한 역사를 구원하라

경향신문

종교인들 모임에서 ‘사람은 변화할 수 있는가?’를 두고 긴 시간 토론한 적이 있다. 종교인들이기에 의당 ‘그렇다’고 답할 줄 알았으나 그러지 못했다. 의외였으나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이 60세 이르러 만난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내 사유에 지진을 일으켰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나를 거리로 불러낸 것이다.

그동안 좌파 철학자들, 예컨대 아감벤, 바디유 그리고 지젝 등이 재구성한 기독교 이해에 마음을 빼앗기던 중 이들 사상의 원류가 벤야민에 닿아 있었고 무엇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핵심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두가 미래를 말하고 진보를 신뢰하는 때에 실패한 과거를 구원하라는 그의 생각이 내 삶에 일부가 되었다. 잔인한 달 4월에 이르고 보니 이 땅에서 실패한 역사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 것 같다. 국가의 폭력과 거짓 그리고 배신으로 묻힌 4·16 참사를 비롯하여 제주 4·3 사건 등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유대적 메시아사상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비틀어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벤야민의 이런 역사관은 내겐 종교 ‘개혁’ 차원을 넘어 ‘혁명’의 길을 제시하는 듯 보였다. 필자가 몸담고 살아온 기독교의 경우 항시 초자연이 중요했고 미래가 우선되었으며 진보와 성장이 언제든 최상의 가치였다.

하지만 그의 역사철학은 역사의 연속성을 중단시켰고 질서 속 진보 개념을 탈각시켰으며 잊히고 닫힌 과거를 소환했고 그것을 다시 열었다. 승리자들의 역사 대신 오로지 희생자들의 그것을 기억하고 치유할 목적에서다.

4월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부활의 절기이기도 하다. 부활이란 생물학적 죽음(sterben)에 반하기보다 사회적인 총체적 불의, 곧 죽음(Tod)과 맞서는 개념이다. 이 점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부활의 본뜻과 조우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미래, 그것을 위해 먼저 희생자들의 역사를 기억하여 현재로 불러낼 것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이정배 | 전 감신대 교수>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