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부정한다'가 던지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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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80년부터 88년까지 재임한 전두환 씨는 제 기억 속에 있는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입니다. 이른바 '땡전뉴스'를 통해 대통령의 동정을 숱하게 지켜보고는 했지만, 너무 어렸던 까닭에 긴 재임 기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5.18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전두환 씨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였습니다. 언론에서 5.18의 실상에 대한 얘기들이 하나둘 흘러나오더니 관련 방송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관련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슬픔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전두환 씨의 회고록을 사서 읽지는 않았지만, 책에서 그분이 스스로를 "5.18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표현했다는 걸 기사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부산 소녀상 옆에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을 세우겠다며 소동을 벌인 남자의 소식도 뉴스에 등장했습니다. 최근 탄핵정국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가짜 뉴스로 몸살을 앓기도 했죠.
이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 건 이번 주 개봉한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를 보면서였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고 공공연히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회 구성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영화는 이 질문에 관한 하나의 사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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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전문가인 유태계 미국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가 쓴 책 '재판에 오른 역사: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와 법정에서 보낸 나날들(History on Trial: My Day in Court with a Holocaust Denial)'을 감독 믹 잭슨(Mick Jackson)이 스크린에 옮긴 작품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의 저서에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인 영국 역사학자 데이빗 어빙을 '나치 옹호자이자 히틀러 숭배자, 사실을 왜곡하고 증거를 조작해 홀로코스트 학살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뒷받침하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라고 표현했다 명예훼손 소송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소송의 과정이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영화의 흥미로운 요소는 어빙이 소송을 낸 영국 법원의 특이한 시스템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명예훼손 소송에선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고소인에게 있는 데 반해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에선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해야 할 책임이 피고소인에게 있다는 거죠.
소송은 시작부터 대중의 관심을 끌고 언론에 대서특필됩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는 학계에서 소수에 불과하고 학자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빙으로서는 잃을 게 별로 없는 싸움이지만, 립스타트의 경우는 다릅니다. 패소할 경우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실이 법정에서 부인되는 위험과 부담을 안고 시작해야 하는 재판이었습니다.
영국의 엘리트 유태인들이 재판 대신 합의를 권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재판을 통해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실이 의혹이나 논쟁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경계한 거죠. "우리는 어빙과 살고 있어요. 어빙은 영국인이고 퇴물이죠. 재판을 해봐야 그의 수명만 늘려줄 거예요…. 데이빗 어빙이잖아요. 그렇게 살게 둬요." '논쟁'보다 '무시'가 더 나은 전략일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유능한 변호사들과 팀을 꾸려 정면승부에 나섭니다. 변호인단은 주인공에게 수용하기 어려운 재판 전략을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갈등도 겪지만, 결국엔 '정의가 승리한다'는 해피엔딩으로 향해가죠. 어빙이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단지 '무능한 학자'가 아닌 '부도덕한 학자'임을 법정에서 증명해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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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과 변호인단 사이 신뢰를 쌓고 난관을 극복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더 눈길이 갔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안타고니스트인 어빙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판결문을 통해 '반유대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역사를 왜곡한 학자'로 낙인 찍힌, '참담한 명예훼손 판결'의 당사자인 어빙은 패소 후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패소 후에도 방송에 출연해 판사에게 모든 역량을 쏟지 않은 것이 패인이었을 뿐 법정에선 피고를 압도했다며 사실을 호도합니다.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음도 명백히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역사를 왜곡하는 학자인 어빙을 상대로 한 이번 싸움에서 이겼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인물들을 상대로 한 싸움을 지난하게 계속해나가야 함을, 그 싸움에서 때로는 이기겠지만 때로는 지기도 할 거라는 것을, 영화의 결말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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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주인공이 승소 후 기자회견에서 하는 말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재판 결과가) 발언의 자유를 위협하는 판결이라고도 하지만 인정 못 합니다.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발언의 자유를 지키려던 거죠. 그것을 남용하려던 사람을 막은 겁니다. 자신이 원하던 바를 말할 순 있지만 거짓을 말하고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죠. 모든 의견이 동등하지는 않아요."
영화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는 립스타트의 1심 승소로 끝을 맺지만, 다행스럽게도 실제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항소가 기각된 뒤 립스타트 측은 어빙에게 재판비용 2백만 파운드(30억 원 상당)를 청구했고, 이로 인해 어빙은 개인파산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만, 이를 악용하고 도를 넘어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모욕하는 거짓말쟁이들에게 상식적인 사회는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못 들은 척 무시하거나 웃으며 희화화하고 넘기는 건 쉽지만 결과적으로 위험한 선택이 되고는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사진=영화 '나는 부정한다' / 제공=모비)
[곽상은 기자 2bwithu@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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