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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트럼프 100일] 캐리어 노동자의 환호와 렉스노드 노동자의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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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르포] 갈라진 미국 노동자들: 인디애나주 현장

멕시코 이전 규모 축소 캐리어 노동자들 “정말 감사”

트럼프 약속에도 전원 해고 렉스노드 쪽은 “트럼프에게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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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캐리어 공장 입구가 출퇴근 차량으로 붐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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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약 40평) 남짓 되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가볍게 맥주나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바에 몇명의 손님들이 둘러앉아 있다. 바 왼쪽으로는 10대의 당구대가 놓여 있고, 다트와 전자게임기들이 벽 쪽에 붙어 있다. 어두운 조명에 시끄러운 음악 소리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선술집 겸 식당이다.

미국 인디애나주 주도인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에어컨과 히터 등 냉난방기기 업체 캐리어 공장의 맞은편에는 이곳 노동자들의 쉼터 구실을 하는 ‘설리스 바 앤 그릴’(이하 설리스)가 있다. 캐리어뿐 아니라 근처 공장 노동자들이 출근 직전에 자투리 시간을 때우거나, 퇴근 뒤 맥주 한잔을 마시며 노동의 피로를 푸는 곳이다. 21일(현지시각) 오후 3시30분께 설리스에 들르니, 비가 추적추적 오고 날씨가 쌀쌀한 탓인지 예상보다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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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으로 지난해 12월1일 이곳 캐리어 공장을 방문했다. 협상을 통해 멕시코로의 공장 이전을 막고 일자리 1100여개를 구해냈다고 자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후에 포드자동차 등에도 ‘압력’을 가해 해외로의 공장 이전을 막았지만, 캐리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봇대 발언’처럼 정치적 상징으로 여전히 각인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100일째인 오는 29일을 여드레 앞두고 식당에서 만난 캐리어 노동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오후 4시30분 교대조 출근 시간을 앞두고 연신 시계를 쳐다보며 오락기 앞에 매달려 있던 돈 보텐거(37)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첫마디를 꺼냈다.

품질관리 검사를 맡고 있다는 그는 멕시코로 공장이 이전했다면 “아이들 학비며, 모기지(집 대출) 상환, 크리스마스 휴가 등 모든 것이 엉클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됐다”며 “공장을 이전했다면 여기서 지금도 어슬렁거리고 있었을 것”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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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트럼프 대통령 치켜세우기는 끊이지 않았다. 추수감사절 휴가 막바지인 지난해 11월말 일자리를 지켰다는 ‘감동적인’ 선언을 했고, 대통령에 당선은 됐지만 취임하지도 않은 “힘든 상황에서” 캐리어 일자리를 지켜냈다고 했다.

캐리어 노동자들은 지난해 대선 기간에 트럼프 대통령을 열광적으로 지원했다. 회사는 지난해 2월 노동자 전원을 모아놓고 2019년까지 멕시코 몬테레이로 공장을 이전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노조에는 30분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노동자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공장을 박차고” 나갔으며 “회사에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때 트럼프 후보가 캐리어 노동자들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공화당 경선을 진행하던 지난해 4월, 그는 캐리어의 공장 이전 방침을 두고 “캐리어의 멕시코산 제품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 회사 쪽이 다시 미국에 남겠다고 애원하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회사의 요지부동에 캐리어 노동자들은 트럼프 후보에게 매달렸다. 난방·환기·공기조절 기술자로 일하는 패트릭 스미스(33)는 이날 식당에서 “이곳 노동자들 가운데 90%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보면 된다”며 “일자리가 달려 있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은 꽤 먹혀들었다. 인디애나주는 전통적으로 공화당 성향이긴 하지만, 트럼프는 여기서 56.5%의 득표율을 올려, 힐러리 클린턴(37.5%)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2012년 대선에서 밋 롬니 공화당 후보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격차(11.5%포인트)의 거의 두 배에 이른다.

캐리어를 포함해 근처 32개 철강회사들의 연합노조인 ‘철강노조 지부 1999’의 지부장인 척 존스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이번 선거는 내가 그동안 봐왔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노동자들이 민주당 후보를 찍었는데, 이번에는 클린턴 후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원했다. 그는 “정말 많은 사람이 트럼프를 지지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도했다. 이들은 캐리어 회사에 사실상 세금으로 700만달러(약 79억원)의 ‘인센티브’를 제공한 것도, 미국에 남게 된 부문에서 일하는 750명을 제외한 나머지 550명의 일자리는 멕시코로 이전될 것이라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퇴임하면 회사가 멕시코 이전을 다시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 점도 잠시 접어두고 싶어했다.

보텐거는 “모든 일자리를 지킨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나름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며 “트럼프가 재임하는 단 4년만이라도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설리스’ 식당 매니저도 “단골손님들이 떠나지 않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지난해 12월1일 트럼프 대통령이 캐리어 공장을 방문했을 때, 노동자들은 “(멕시코) 장벽을 쌓으라”며 그의 공약에 화답했다.

캐리어 노동자들의 환호 반대편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해고가 진행 중인 기계부품 제조업체인 렉스노드 노동자들의 ‘배신감’과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일 트위터를 통해 캐리어와 1.6㎞ 떨어진 렉스노드에 대해서도 “노동자 300명을 모두 잔인하게 해고하고 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트위트 4개월 뒤인 지난 3월말, 렉스노드는 1차 해고자 명단을 통보했다. 5월 중순까지 300명이 모두 해고된다.

24년6개월 동안 렉스노드에서 근무했다는 브라이언 리드(46)는 21일 철강노조 사무실에서 “앞으로 2~3주 안에 모두 해고된다”, “나도 당연히 포함돼 있다”고 말하며 눈물을 비쳤다. 그는 “다행히 일자리를 찾았는데 월급이 렉스노드보다 너무나 적다. 그래도 다른 회사를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드는 대학생 딸이 있고, 2년 뒤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아들이 있다고 했다. 안정적인 직장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거의 모든 동료들이 트럼프를 지지해, 내가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며 “하지만 유세 때 ‘트럼프’, ‘트럼프’를 외쳤던 그들은 이제 트럼프에게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가 정치적 효과만 노려 캐리어만 신경썼을 뿐, 인원이 적은 렉스노드한테는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독단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개별 기업에 보조금을 주거나 협박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지키는 캐리어식 처방은 ‘정실 자본주의’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어쩌면 트럼프식 처방이 만들어낸 더 큰 상처는 노조 지도부와 현장의 분리, 살아남은 자와 해고당하는 자의 장벽일지도 모른다.

존스 철강노조 지부장은 “노동자들 사이에 큰 분열이 있다. 일자리를 잃거나 잃을 사람들은 힘들어하지만, 일자리를 지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거의 쓰지 않고 있다. 그런 분위기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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