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굴에 공부 못하면 안습이다.”, “그 성적에 웃음이 나오냐?”, “2호선 타자.”, “우리 엄마도 계모임에서 말 좀 해보자.”
한 포털에서 ‘급훈’을 검색하면 나오는 말들이다. 물론 이런 급훈을 사용하는 교실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 학급의 교육목표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SKY-서성한-지거국-지잡대’로 이어지는 촘촘한 대학 서열 체제에서 더 높은 곳에 가야 학생은 유능한 사람으로, 교사는 능력 있는 교사로, 학교는 명문으로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고 소위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야 인정받는 문화는 우열반 편성하기, 성적순으로 개인 자습실 부여하기, 심지어 성적순으로 밥 먹기 등 학교에서 성적으로 차별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은 학교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과 성숙한 시민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성적으로 차별하는 학교와 사회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행복한 삶은 대학에 들어간 뒤에나 꿈꾸라는 사회적 억압은 우리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수년째 OECD 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2016년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청소년 자살률은 10만명당 7.4명으로, 대략 계산해 보면 한 해 평균 690명 정도가 된다. 매년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2배가 넘는 아이들이 성적비관과 입시 고통 등의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있는 것이다.
교육운동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사교육을 조장하는 ‘나쁜 광고’ 사례로 선정해 공개한 한 학원의 광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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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뿐 아니라 학부모의 고통도 매우 심각하다. 며칠 전 한 학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한 자녀가 집에 와서 한 첫 이야기가 ‘선생님이 그러는데 인서울 못하면 쓰레기 취급 받는대.’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가 서울에 있는 대학 가겠다고 마음먹었고 학원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정말 학원 안 보내고 키워 보려고 했는데 공부 못하면 학교에서 차별 받을까봐 학원에 보내야 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학교와 사회에서 차별 받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부모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계청과 교육부가 발표한 2016년 사교육비 통계를 보면 초·중학교의 사교육비는 다소 줄어든 반면 고등학생의 사교육비는 1인당 평균 2만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소득이 줄어도 대입을 위한 사교육비는 늘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노후 대비도 포기하는 현실, 이것이 두려워 출산과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실제 상황이다.
대선 후보들은 대입과 대학 서열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행복한 교육, 살고 싶은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대 폐지, 공동학위제 등 대학 서열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 학생부종합전형(학종)과 수능 비율 조정, 수능 자격고사화, 논술 폐지 등 입학전형 방식 개선을 위한 공약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런 공약들은 매우 의미 있지만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제도인지, 실현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 확신을 갖기 쉽지 않다.
‘줄의 수’가 아니라 ‘줄 세우기’ 자체가 문제
대학입시가 시작된 1945년 이후로 무려 17번이나 제도를 바꾸었지만 문제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다. 과거 정부는 문제의 핵심은 ‘한 줄 세우기’이므로 ‘여러 줄 세우기’를 하면 대입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학특기자, 과학특기자, 논술부터 최근의 학종까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줄이 무려 3000여 가지로 늘어난 적도 있다. 하지만 줄이 생길 때마다 친구보다 1점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만 늘어날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더 빨라졌고, 최근엔 유치원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대학입시는 대학에 들어가는 ‘줄의 수’가 아니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세우는 것’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국영수가 아니라 논술 심지어 인성과 창의성까지 수치화하여 줄 세우고 1점이라도 높은 학생을 뽑으려는 선발 방식이 문제다. 지난 70년간 수없이 많은 대입제도 변화에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처럼 줄 세우고 1점이라도 높은 학생을 뽑는, ‘경쟁을 통한 선발’ 방식이다.
모든 시험은 측정 오차가 있기 때문에 1점, 아니 5점 차이가 나더라도 수학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0.1점이 높으면 수학능력이 뛰어나다는 비과학적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5등급으로 나누면 이른바 상위권 대학을 제외하고 충분히 입학 자격을 나눌 수 있음에도 단지 소위 10%의 상위권 대학에 들어갈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나누기 위해 촘촘하게 등수를 나누는 시험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서 충분히 학업을 할 능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내신, 논술, 심지어는 창의력·인성까지 친구보다 1점 더 많이 받기 위해 끊임없이 불필요한 경쟁에 내몰리고 학부모는 아이들 경쟁을 뒷받침하느라 등골이 휘는 것이다.
교육 선진국은 일정 자격이 되면 입학을 보장해주는 제도 운영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이런 입시제도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입시제도는 중국이나 인도 등 급속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아시아권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2014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펴낸 <대학입시 정책의 국제비교 연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교육 선진국은 경쟁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기보다 일정한 기준이 되면 대학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교육법으로 “모든 바칼로레아 취득자는 일반대학 공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면 누구나 파리 1~13대학 등 전국 85개의 대학 중 어디서든 교육을 받을 권리를 국민들에게 주고 있다. 오히려 별도의 선발을 할 수 있는 대학의 종류를 법으로 명시하여 대학이 바칼로레아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 물론 프랑스에도 그랑제꼴이라는 선발 경쟁을 하는 소위 명문대학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랑제꼴은 정원이 100~200명 정도의 소규모 학교이고, 학비도 저렴할 뿐 아니라 그랑제꼴을 졸업한다고 일반대학 졸업자에 비해 노동시장 진입 단계에서 보상의 차이가 크지 않다.
세계 100대 대학의 40~50%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이 많은 미국도 일정한 자격이 되면 입학을 보장하는 것은 프랑스와 마찬가지이다. 미국 대학의 26%는 지원자 전원을 합격시키고 있다. 캘리포니아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캘리포니아 거주 고등학생들 가운데 일정한 성적 이상을 갖춘 학생들에게 주립대 입학을 보장한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는 유시버클리와 같은 세게적인 명문대도 여럿 포함돼 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학생을 뽑아야만 우수한 대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프랑스·미국뿐 아니라 교육 선진국으로 평가받는 독일·핀란드·영국·네덜란드·캐나다 등은 고등학교 졸업시험 통과 등 일정 자격이 되면 입학을 허락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의대와 법대와 같이 학생들이 선호하는 전공조차 경쟁을 통한 선발 방식이 아닌 ‘가중치 추첨제’라는 추첨을 통해 입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경쟁을 통한 선발 방식이 아닌 일정 자격이 되면 입학을 보장하는 해외 교육 선진국과 같은 대입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고통스런 대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거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 배정 정책을 통해 해결하였다. 무시험 추첨제, 평준화 배정 제도는 경쟁을 통한 선발에서 일정 자격이 되면 배정하는 방식, 즉 입학 보장으로 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입학보장제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문제 해결
이런 배경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오랜 논의와 고민 끝에 ‘대학입학보장제’라는 새로운 입시제도를 제안했다. 이 제도는 간단히 말해 대학 정원의 70%는 수시 전형을 통해서 일정한 내신 등급을 갖춘 학생에게 입학을 보장하고, 나머지 30%는 정시 전형을 통해서 일정 수능 등급을 갖춘 학생에게 입학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대학에 적용하자는 건 아니다.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 뒤 공모를 통해 학교를 선정하게 된다. 대학입학보장제에 참여하는 대학에는 실질적인 반값 등록금, 교수 1인당 학생수 OECD 평균 수준 감축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대학입학보장제 참여 대학의 입학은,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학부(전공)를 1순위와 2순위로 먼저 정한 뒤 한 학부당 1지망부터 6지망까지 6개의 대학에 지원하면 국가 단위의 통합 입학관리센터에서 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평준화 지역 고교 배정 방식과 유사하다.
과거에는 입학을 원하는 학생이 정원보다 많아 경쟁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학령기 인구 감소로 앞으로는 대학 정원보다 입학할 학생이 턱없이 부족한 환경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과거처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과도한 경쟁을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다.
대학입학보장제가 실시되면 더 이상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학생들은 문제집이 아닌 인문학 책을 읽고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 학교는 강제로 공부시켜 소위 명문대에 많이 보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아실현을 돕고 타인을 배려하고 협력할 줄 아는 학생을 키울 수 있게 된다. 또 ‘여러 줄 세우기’, ‘깜깜이 전형’도 없어지기 때문에 사교육 문제도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학부모들은 더 이상 불필요한 사교육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이 여가 생활과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교육이 고통이 아닌 모두의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대입제도가 경쟁을 통한 선발 방식이 아닌 일정 자격이 충족되면 입학을 보장하는 대학입학보장제가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난 70년간 17번이나 제도를 바꾸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대입제도로 인한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길이다.
김성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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