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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손 빼기와 손 뻗기, 그 머나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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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오은의 오손도손

위기 모면 위한 ‘손 빼기’로 우정 금갔던 경험…필요한 건 ‘함께하는 온기’ 깨달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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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손을 감추면 문다.

바다가 축 늘어진 이쪽은

아무도 짖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법칙처럼

얼른 손을 빼고 발을 빼고

생각도 빼고

당신은 정성껏 꼬리를 감추고

그물 속에 우리는 언제나 텅 비어 있다

-권주열, ‘수평선 0.001’(<붉은 열매의 너무 쪽>, 파란, 2017) 중에서

나는 머리를 잘 굴리는 아이였다. 머리를 써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고? 아니다. 머리보다도 잔머리를 잘 굴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은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풀기 위해 애쓴다. 잔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잔머리를 굴린다는 것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얕은꾀를 생각해내는 것이다. 일단 도망가기 위해서 빠른 시일 내에 들통날 게 빤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잔머리를 써서 한 거짓말이 철두철미하거나 용의주도할 리가 없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상대가 잔머리를 굴렸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꾀는 약고도 얕아서 다음 질문이 조금이라도 묵직하거나 날카로우면 이내 발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잔머리를 쓴 사람은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또다른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덮기 위한 거짓말. 그래서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눈은 녹지만 거짓말 위에 거짓말이 얹어지면 퇴적층이 형성된다. 어느 순간 변성암 지층처럼 제3의 거짓말로 탈바꿈할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나는 쉬는 시간에 별의별 놀이를 다 했다. 딱지치기나 공기놀이처럼 좁은 공간만 있어도 되는 놀이부터 책상을 한쪽으로 밀어서 넓은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말뚝박기까지, 쉬는 시간만 되면 상상력과 의지가 십분 발휘되곤 했다. 한동안은 팽이가 유행해서 불빛을 밝히며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팽이를 열심히 쳤던 기억도 난다. 책상 위에 칠판지우개 두 개를 나란히 놓아 네트를 만들어 실내화로 탁구를 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기 5분 전부터 다가올 쉬는 시간에 할 놀이 준비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여느 날처럼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뛰놀던 날이었다. 그 당시에는 10분이 왜 그렇게 짧았는지 모른다. 쉬는 시간은 10분이고 수업 시간 50분이던 시절, 수업 시간이 쉬는 시간의 다섯 배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상대적’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면서 나는 쉬는 시간이 유독 짧게 느껴졌던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놀이가 흥미진진해질 때쯤 기다렸다는 듯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산통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종이 울릴 때마다 “산통이 깨졌다”고 아쉬워했다.

“야, 1분 남았어. 한 세트만 더 치자.” 그날은 실내화로 탁구를 치던 날이었다. 책상이 크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주로 박진감 넘치는 복식 경기를 했다. “그래, 그러자. 선생님이 종 딱 울리자마자 들어오시진 않을 테니.” 실내화를 든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시작한다!” 경쾌하게 서브한 공이 칠판지우개를 넘고 상대편 진영에 떨어졌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상대편 친구들이 넘어온 탁구공을 서로 치려다 실내화가 부딪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의욕이 앞선 것이다. 그 바람에 실내화 하나가 공중으로 튕겨져 올랐다. 천장에 있던 형광등이 와장창 깨졌다.

거짓말에 거짓말 쌓던 어린시절
잔머리로 혼자 빠져나가 죄책감
“개는 손을 감추면 문다”
다시 손 뻗기의 어려움 절감

때마침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반사적으로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실내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재빨리 그것을 발에 신었다. 내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민첩함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미처 실내화를 신지 못한 친구들이 손에 실내화를 든 채 망연하게 서 있었다. “거기 세 녀석, 앞으로 나와!” “너희 셋이 다야?”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불쑥 나를 지목하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 “네? 저, 저, 저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뛰었어요.” “난데없이 왜?” “네?” 선생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듯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셨다. 이미 땀이 흥건한 얼굴 위에 거짓말처럼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50분 동안 복도에서 손을 들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내 눈은 자꾸 복도 쪽을 향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생생한 죄책감이었다.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초침 소리에 맞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자꾸 흘러내렸다. 다음 쉬는 시간이 되었다. “거기서 어떻게 그렇게 손을 뺄 수가 있냐?” 벌섰던 친구들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너는 의리도 없냐?” “너는 진짜 잔머리 대장이야.” “앞으로 너랑 안 놀아.” 순식간에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빼버린 무책임한 아이, 그 와중에 잔머리를 쓴 영악한 아이, 그것도 모자라 우정까지 배신한 못된 아이가 되었다. 아홉 살이 생각하기에 의리는 장래 희망처럼 너무 멀리 있는 단어였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내화를 신고 있던 발이 내내 저릿저릿했다.

한동안 그 친구들은 나와 놀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나 대신 다른 아이와 함께 넷이 탁구를 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뒤로도 다급한 상황이 닥치면 나는 또다시 별생각 없이 손을 빼버리고 말았다. 다른 친구를 사귀고 잘 어울리다가도 어김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비슷한 패턴으로 친구들이 떠나가는 것을 깨닫고 어느 날 나는 스스로를 질타했다. 문득 선생님의 뼈 있는 물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난데없이 왜?” 나는 비겁해서 난데없이 손을 빼곤 했던 것이다. 잘못의 근원에 가닿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한번 담근 손을 섣불리 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바둑을 둘 때 손 뺀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바둑에서는 상대방이 던진 수를 외면하거나 형국이 무난하다고 믿고 더 이상 응수하지 않는 경우를 일컬어 손을 뺀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둑에서 빼는 손은 내가 빼곤 하던 손과는 완전히 반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빼기 위해 속임수를 썼지만 바둑에서는 속임수에 들지 않기 위해 손을 빼야 한다. “어떤 일에 발을 들였다가 영 이상하다 싶으면 손을 빼야 해.” 상황에 따라서는 잠자코 기다리는 일보다 손을 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개는 손을 감추면 문다”고 한다. 사람이 손 뒤에 뭔가를 숨겼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빼서 감추는 바람에 친구와 사이가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우정은 쉽게 회복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을 빼고 난 다음에는 언제나 ‘텅 비어 있다’고 느꼈다. 내가 손을 뺀 자리에는 손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빼는 일, 그러니까 하고 있던 일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빠져나온 일을 향해 다시 손을 뻗는 일은 몇 배로 힘들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 전으로 돌아가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손을 담그던 사람과 손을 빼려는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함께하겠다는 온기다. 그리고 이 온기는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은 시인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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