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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추사의 법고창신과 융합 정신, 문화 글로벌 시대에 배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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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연구 40년 ‘추사 명품’ 펴낸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소장

경향신문

40년에 이르는 추사 김정희 연구를 집대성해 <추사 명품>을 펴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지난 19일 “공부하는 사람에겐 추사처럼 법고창신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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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넘어 동아시아를 풍미한 인문학자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아직도 학계가 넘어야 할 높은 봉우리다. 그는 이 땅에 고증학·금석학 기틀을 세웠고, 추사체를 통해 문자미에 회화미까지 갖춰 서예를 조형예술로 승화시켰다. 시에 일가를 이룬 큰 시인이자 문장가였으며,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화가, 선종의 핵심을 깨달은 선지식이었다. 학계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의 학문과 예술세계가 그만큼 넓고 깊다는 뜻이다.

추사 연구 40년에 이르는 가헌(嘉軒)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75)이 추사 연구에 획기적 디딤돌이 될 역작을 펴냈다.

추사가 남긴 작품들의 연대를 밝혀 시대순으로 배열(편년)하고, 원문과 번역문을 실어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秋史 名品>(추사 명품·현암사)이다. <추사 명품>은 초상을 시작으로 편액(扁額), 임서(臨書), 시화(詩話), 대련(對聯), 서첩(書帖), 회화(繪畵), 서간(書簡), 비석(碑石) 글자로 분야를 나눠 컬러 도판 267장에 참고 도판 150여장을 실었다. 추사체 이해를 위해 ‘중국 서예사의 흐름’ ‘한국 서예사 대강’이란 글도 덧붙였다. 특히 작품과 함께 작품 속 인장을 설명하고, 그 인장을 시대별로 분류까지 했다.

지난 19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을 찾았다. 책 이야기와 더불어 추사의 정신, 추사의 작품이 지금 이 시대에 갖는 의미가 궁금해서다. 동양의 인문정신이자 자신의 학문 태도를 드러내는 ‘經經緯史’(경경위사·경학을 날줄로 삼고 역사를 씨줄로 삼는다) 액자가 걸려 있는 방에서 노학자는 여느 때처럼 한복을 입고 차를 끓여낸다. “수척해진 듯하다”고 말문을 열자 “나이가 있어서인지 책 쓰느라 진이 빠졌다”며 웃는다.

- 머리말에 ‘<겸재 정선>(전3권)이 겸재 그림 감정의 기준이 되듯 <추사 명품>도 추사 서화 감상과 감정의 기준서가 되리라 굳게 믿는다’고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수록 작품의 선정 기준은 어떻게 잡았습니까.

“제가 판단하기에 진적(품)이고, 제작연대가 분명한 것을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제작연대가 없더라도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실었고. 간송미술관 수장품만으로는 편년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기관·개인 수장품 가운데 연대가 분명한 것도 모아 정리했습니다. 추사 작품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죠. 후학들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 추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데, 추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중앙박물관에 있던 1965년 가을, 혜곡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 권유로 추사 고택의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을 찾아 제를 올린 게 처음이죠. 이듬해 지금의 간송미술관으로 왔고, 1971년 간송미술관 첫 전시로 조선 고유색을 드러낸 진경산수화의 ‘겸재전’을, 1972년 2~3회로 ‘추사전’을 연이어 열었죠. 전시를 기획하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최 소장의 연구는 겸재 정선(1676~1759), 추사, 불교미술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 역사와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제 식민사관 극복을 화두로 삼았던 그에게 이들 주제는 조선 고유 문화의 빼어남을 통해 식민사관을 뒤엎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가 아닌 중앙박물관, 곧이어 간송미술관을 선택한 것도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연구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학, 박물관에선 식민사관 극복을 해낼 수 없다고 판단했죠. 결국 간송미술관으로 왔고, 겸재 그림과 추사 글씨를 통해 식민사관 극복이 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겸재와 추사 연구가 식민사관 극복의 두 축이 된 것이다. 최 소장은 1972년 추사전 당시 ‘김 추사의 금석학’이란 논문으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고, 1976년에는 학계에 추사 연구의 기반이 된 <추사집>(2014년 개정)을 출간했다. 겸재의 경우,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겸재 정선 평전> 등에 이어 연구성과를 종합한 <겸재 정선>(전3권·2009년)을 펴냈다. 최 소장은 제자들과의 학문공동체 ‘간송학파’를 이끌며 미술사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독자성과 주체성·세계성까지 이룬 문예부흥기 ‘진경시대(문화)’를 학계에 정립시켰다. 진경문화는 조선 문화사를 다시 보게 했고, 이는 식민사관을 뒤집는 것이었다.

- 추사 작품은 전시 때마다 큰 주목을 받는데, 작품들에 녹아 있는 일관된 흐름, 공통적 요소가 있을까요.

“융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추사체만 해도 역대 모든 명필의 필법과 필의를 터득한 뒤 이를 하나로 융합시킨 겁니다. 중국에서도 못한 일이어서 중국 대학자들이 추사를 칭송하는 것이죠.”

- 그렇다면 추사의 작품, 학자와 예술가로서의 삶의 태도가 지금 이 시대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추사는 역대 성과들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융합했고, 더 나아가 새로운 것, 즉 자신의 것으로 창조해냈다는 게 중요합니다. 옛것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이죠. 이 시대에 추사가 지니는 의미, 그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바로 법고창신입니다. 겸재를 중심으로 한 진경시대가 중요한 것은 당시 압도적·지배적이던 중국 문화를 극복해 조선 것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죠. 추사도 마찬가지이고요. 글로벌 시대에 해외 문화를 수용하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 것으로 재창조해야 합니다. 과학이든 경제든 문화든 그 어느 분야에서나.”

- 이제 일생의 과업인 겸재, 추사 연구를 일단락 지은 것인가요.

“그렇죠. 다만 추사 평전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추사 일생을 꼼꼼하게 연보 형태로 정리해왔습니다. 이제 겸재처럼 제대로 된 추사 평전을 만들었으면 하는데,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못하면 제자들이 해내겠죠. 허허.”

최 소장은 ‘간송학파’의 치열한 공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제자들에 향한 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공부는 쉬운 일이 아니죠. 추사 때나 그 이전이나,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연구자에겐 특히나 앞선 사람의 성과를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법고창신이 더 중요합니다. 추사처럼 말이죠.”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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