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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서재필박사는 알아도 김점동박사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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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한국에서 과학하는 여자들의 '장벽 허물기' 역사…한국에도 '히든 피겨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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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상 여성은 참석이 불가능해요."

"남자만 지구를 돌라는 규정도 없어요."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에 큰 공을 세운 흑인 여성 과학자 3명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에 나오는 대사다.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가해 재능을 펼치던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이 자신도 브리핑에 참석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상사는 NASA 규정을 거론하며 여성이라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는다. 남성중심으로 운영되던 NASA에서 여성은 차별의 대상이었다.

◇ 후학 양성부터 여성 운동까지…한국 과학 속 '히든 피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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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히든 피겨스가 있다. 의료 소외 계층이던 여성 환자를 돌본 여성 의사, 한국 의학 발달의 숨은 공로자인 여성 간호사, 후학 양성에 헌신한 여성 과학자 등이다.

한국 첫 여성과학자로 꼽히는 김점동(박에스더)은 한국 여성 최초, 한국인으로는 서재필에 이은 두 번째 의사다.

김점동은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과학자 마리 퀴리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퀴리보다 10년 늦은 1877년에 태어나 1896년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사가 된 뒤 바로 귀국해 서울 동대문의 구제병원 등에서 열심히 환자를 진료하다 1910년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과학기술분야 여성 참여의 초석이 된 그는 개화기 서양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애썼다.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도 세웠다. 그의 영향으로 의사를 희망하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현 고려대 의대) 설립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김점동을 비롯해 허영숙, 이채희, 장문경 등 여성 의사들이 남성의사에게 갈 수 없던 많은 여성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나 사회적 편견 때문에 대부분 소아과나 산부인과를 개원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근대 초기 여성 간호사들은 한국 의학 발달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1991년 나이팅게일기장(국제적십자위원회가 주는 세계최고 영예 상)을 수상한 박명자는 국내 마취의학과 간호행정 체계화에 크게 기여했다.

박명자는 1949년 서울대 의대 부속 고등간호학교에 입학, 다음 해 6.25가 발발하자 육군 소위로 군 병원에서 근무했다. 군 병원에서 최신 의료기술을 습득한 그는 전역 후 간호학생과 의과대학생들에게 새로운 마취술을 가르쳤다. 1966년에는 수술과 마취에 관한 단행본도 펴냈다. 또 당시 12시간 2교대 근무를 하던 간호사들을 위해 정부 관계자를 설득해 간호인력충원, 3교대와 근무별 간호감독 제도화 등의 결실을 얻었다.

이 밖에도 한국 첫 나이팅게일기장 수상자 이효정, 지역사회간호사업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금전(나이팅게일장 수상), 항일 민족 투쟁과 여성운동에 앞장섰던 전문 조산원(산파) 정종명 등이 있다.

한국의 여성과학자들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 시대다. 당시 국내외 대학에서 과학기술을 전공한 여성은 총 17명. 국내 4명, 일본 2명, 미국 11명이었다. 이중 의약학 전공이 12명, 이공학 4명, 농학이 1명이었다.

한국 과학계 첫 여성 박사(Ph.D)는 1929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공중보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송복신이다. 생물학 분야에서는 이유한(1950년대 후반), 화학 분야에서는 모정자(1950년대 후반), 공학 분야에서는 박순자(1971년)가 여성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3년 일본에서 학위를 받은 김삼순 박사는 서울대와 서울여대 등에서 연구활동을 활발히 해 실질적인 최초의 여성 과학연구자로 평가 받는다.

◇ 대학원부터 연구소까지 이어지는 성차별…'과학 하기' 힘들었던 한국 여성과학자들

한국의 초중기 여성 과학자들은 연구보다는 교육에 헌신했다. 과학교사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교육자가 되겠다는 자의도 있었지만 연구소 내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문제도 원인이었다.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가 2010년 1920~60년대 출생 전·현직 여성 과학자 21명을 심층 면접을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과학자 대부분은 성차별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 진학 단계부터 성차별은 존재했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이유 혹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여성을 뽑지 않는 실험실도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남성 중심적인 실험실 문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진술도 다수 나왔다.

여성이기 때문에 채용 과정에서 논란이 되거나 박사 학위증을 의심받기도 했다. 여성이란 이유로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는 차별도 당했다. 1970년대 들어 정부출연연구소들이 늘어났지만, 여성에 채용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입사 후 성과와 무관하게 승진기회에서 밀리거나 업적 평가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기도 했다.

결혼과 육아도 여성 과학자들의 경력 쌓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면접에 참여한 모든 기혼 여성 과학자들은 육아와 학위 취득, 연구 활동을 병행하는데 육체적, 정신적, 시간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 비정규직 비율 남성의 4배…활동 영역 넓혔지만 장벽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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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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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계에서 여성 과학자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최근 10년간 우리나라 여성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신규 채용된 정규직 인력 중 여성 비율도 소폭이지만 꾸준히 상승 중이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이 지난 1월18일 발표한 ‘2015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활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은 4만3402명으로 전체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22만3756명)의 19.4%에 해당한다.

신규 채용 규모는 5591명(24.2%)으로 전년도인 2014년보다 260명(1.5%p) 증가했다. 이 가운데 정규직은 3406명(20.7%)로 47명(0.9%p) 늘었다. 보직, 승진의 규모와 비율도 모두 전년 대비 증가했다. 여성 보직자 규모는 2869명으로 전년대비 407명(1.2%p), 여성 승진자 규모는 1588명(13.7%)으로 69명(0.8%p)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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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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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성 과학자들의 활동 장벽은 여전하다. 각종 연구재단의 2015년 연구비 지원 현황을 보면 남성은 1인 평균 1억5000만원을 받았지만 여성 지원금은 평균 5500만원에 그쳤다. 또 국내 4개 과학기술원 교수 1048명 중 여성은 약 10%(110명)밖에 안 된다.

비정규직 비율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전체 여성과학기술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43.4%로, 정규직 비율은 56.6%에 그쳤다. 반면 남성과학기술인력은 정규직 비율이 비정규직 비율인 20.5%의 4배에 가까운 79.5%로 나타났다.

◇ 경력단절 여성과학자 지원한다…후배 위한 선배 여성과학자들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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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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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2000년부터 여성 과학기술자를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본격화했다. 2000년 여성 과학자 연구개발 전담 지원 사업이 시작됐고, 2001년 여학생 친화적 과학교육 프로그램(WISE) 실시, 올해의 여성 과학자상 제정, 여성 과학기술 인력 DB 구축, 여성 과학기술 인력 채용 목표제 도입이 이뤘졌다.

2002년에는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이 법률에 의거해 2004년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기본 계획이 마련됐다. 2005년부터는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위셋(Women In Science and Technology, WISET) 사업이 시작됐다 .

위셋은 2012년부터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이공계 여성과학기술인들이 현장에 복귀해 연구기관의 연구개발과제에 참여하도록 지원했다. 이 사업으로 약 160여명의 경력단절 여성연구원들이 60여개 기관으로 복귀했다.

여성과학기술인의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법적 의무제도와 자율적 제도의 운영률은 2007년 이후 꾸준히 증가 추세다. 법적 의무제도 운영률(94.3%)과 자율적 제도 운영률(51.0%)은 전년 대비 소폭 상승(0.6%p, 0.4%p)했다.

◇ 왜 실험 대상은 대부분 남성(수컷)?…연구 방식으로 번지는 '젠더 혁신'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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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영 여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장은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연구에서 젠더분석 도입을 위한 연구지원 정책 공청회'에서 "과학기술연구에서 성분석과 젠더분석 도입이 연구의 수월성과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시급하다"고 말했다./사진제공=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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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 세계 과학계의 성차별 혁신 대상은 과학자의 범위를 넘어서 과학기술연구 자체로 확산됐다. 과학기술연구 과정에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한 '성·젠더 분석'을 도입하자는 움직임이다.

그동안 과학기술연구는 대부분 남성에 의해, 남성(수컷)을 대상으로 이뤄져 성편향적 연구 결과가 도출되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과총)는 과학기술연구에서 젠더 혁신을 이루기 위해 최근 다양한 포럼과 공청회를 진행하고 있다.

백희영 여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장은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연구에서 젠더분석 도입을 위한 연구지원 정책 공청회'에서 "과학기술연구에서 성분석과 젠더분석 도입이 연구의 수월성과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날 패널로 참석한 조옥라 서강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성에 따른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과학자가 성 차이를 고려한 연구와 과학기술을 발달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우선 과학자와 정책입안자를 대상으로 젠더 감수성을 강화시키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준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국내 연구자들이 동물 실험시에 수컷과 암컷의 실험동물을 균등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 지도해야 하며 이러한 젠더 관련 국내 연구가 많아져야 한다. 또 젠더 혁신 개념을 과학기술자 뿐만 아니라 제약업계 및 전 국민에게도 널리 홍보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혜숙 젠더혁신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과학기술기본법에 젠더혁신 개념을 반영해야 한다. 또 전 연구지원 기관에서 젠더분석이 필요한 분야에 지원정책을 우선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중곤 한국연구재단 공학단장은 "젠더혁신과 관련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여성과학자에 대해 중견연구에서 20% 연구비 지원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며 "장차 젠더를 고려한 연구비의 규모를 확대하는 정책 수립 등 젠더 관련 연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영민 기자 lets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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