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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금기 깬 ‘최초의 누드화’ 김관호도 내 아버지도 불운한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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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⑪ 천재 화가 김관호의 영광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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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인 김관호의 ‘자화상’. 평양 중성리 같은 동네에서 살아 부친 김찬영과 자주 어울리던 김관호를 김병기는 ‘훤칠한 키에 콧수염을 기르고 사냥을 잘했던 호남’으로 기억한다. 도쿄예술대학 자료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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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그림이라는 여학생들의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려보니 대동강 석양에 목욕하는 두 여인을 화(畵)한 김관호의 <해질녘(夕暮)>이라. 아아! 김관호군이여! 감사하노라. (…) 군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다사(多謝)하노라.”(<매일신보> 1916년 10월28일)

춘원 이광수의 ‘감탄사’이다. 1916년 도쿄의 문부성 미술전에서 김관호 유화작품 <해질녘>을 보고 서울로 써 보낸 감동의 찬사이다. ‘아아! 김관호군이여! 감사하노라.’ 다양한 국가 참여의 국제전도 아닌 일본의 공모전에 출품한 것을 두고, 춘원은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했다’고 감동했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자긍심과 울분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일까. 하기야 <해질녘>은 특선작으로,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과 다름없었다. 1500여점의 응모작 가운데 96점만 입선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선(3등상)! 그러니 춘원은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 특선, 특선! 특선이라 하면 미술계의 알성급제(謁聖及第)라.” 과거에서의 장원과 같은 쾌거, 도대체 어떤 작품이었길래 이렇듯 ‘호들갑’일까.

원래 <해질녘>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졸업미전 출품작이었다. 당시 신문 보도의 제목처럼 ‘월계관의 영예를 얻은 김관호군-미술학교 최고점으로 졸업’, 95점의 출품작 가운데 최우등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1911년 춘곡 고희동의 1년 후배로 서양화과에 입학한 김관호는 우리나라 두 번째 유화가로 5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1916년 3월 김관호의 나이 27살 만학도였다. 오래전 필자는 우에노공원 안에 있는 도쿄예술대학을 방문하여 김관호의 성적표를 확인한 적이 있다. 졸업학년의 성적은 95점으로 최고였다. 하지만 1학년 때 성적은 65점에 불과했다. 저조했던 성적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75점, 78점, 84점을 받다가, 마침내 95점으로 향상된 것이었다. 이런 성적은 실기과목의 평균 점수였다. 한 해 앞서 졸업한 고희동이, 석고 데생시간에 명암법조차 몰라 당황했던 것에 비하면, 김관호의 최우등은 놀라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1916년은 김관호의 해였다. 봄에는 최우등 졸업, 가을에는 문전 특선. 화려한 영광, 그 자체였다.

걸작 <해질녘>은 어떤 작품인가. 현재 도쿄예술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서울에서도 몇 차례 공개된 적이 있다. 내용은 무엇보다 ‘나체화’라는 사실이다. 강에서 목욕하고 나와 머리카락을 말리는 두 여성 뒷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배경은 평양 대동강의 능라도 부근으로 한적한 풍경이다. 김관호는 고향에 와서 우연히 목욕하는 젊은 여성들을 목도하고, 강렬한 인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원래는 여체만 묘사했다가 뒤에 석양의 풍경을 곁들여 보완했다. 누드 그림, 1910년대 서양미술 수용기의 분위기로 볼 때, 이는 파격 가운데 파격이었다. 전통미술의 관념으로는 나체화라는 개념조차 부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당시 <매일신문> 보도를 보면, “김군의 그림 사진이 동경으로부터 도착했으나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이라고 밝혔다. 나체화이기 때문에 보도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지면엔 김관호의 풍경화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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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서양화가 2호’인 김관호는 3호인 김찬영과 더불어 시대의 벽에 무너진 한국 미술사의 선구자였다. 김관호는 1916년 도쿄미술학교 수석졸업 작품이자 일본 문부성 미술전 특선작인 나체화 ‘해질녘’(위 사진)으로 천재 화가의 재능과 명성을 인정받았다. ‘해질녘’은 도쿄예술대학 자료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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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0월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일본 문부성 미술전 입상자 발표 기사. ‘특선’ 명단에 ‘해질녘(김관호)’가 들어 있다. 엄청난 경쟁을 뚫은 조선인 최초 입상 소식에 이광수는 축사를 써서 경성의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고희동 이은 ‘2회 서양화가’ 김관호
도쿄미술학교 수석졸업작품 ‘해질녘’
1916년 일본 문부성 미술전 ‘특선’
“아! 알성급제라” 춘원 감탄해 ‘기고’


평양 돌아와 ‘최초의 유화 개인전’도
하지만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국내 신문에 작품 사진 실리지 못해
1923년 조선미전 ‘호수’도 촬영금지


계속된 제동 10년만에 붓꺾고 폐인
1950년대 재기했으나 천재성 퇴색


‘평양 이웃’ 김병기 문화학원 면접때
“일본 교수가 ‘김관호씨’ 안부부터 물어”
1년 후배 김찬영과 사냥 즐긴 명포수
“내게 그림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했다”


김관호는 1923년 조선미전에 단 한 차례 출품했는데, 바로 <호수>라는 작품이었다. 이 그림 역시 나체화였다. <해질녘>은 그나마 여성의 뒷모습이었지만 <호수>는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여성의 전면을 화면 가득 그린 것이었다. 역시 금기 작품으로 꼽혔다. 미술전시에 출품은 허락하지만 ‘나체화 촬영 금지’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래서 언론에서 이렇게 비판하기도 했다. “나체의 부인을 모델로 하였다 하여 보이기는 하나 신문에 박아내지는 못하게 하였더라. 이에 대하여 모 화가는 분개하여 말하되, 예술의 나라에까지 정부 당국자의 이해 없는 권력이 미치어서는 참으로 불쾌한 일이라 하더라”(<동아일보> 1923년 5월11일). 김관호의 천재성은 계속 저지당하면서 상처를 입었다. 하기야 유화라는 캔버스 그림도 생소한 판에 ‘벌거벗은 여인의 그림’이라니, 이는 경악 그 자체였다. 나체는 알몸(naked)과 누드(nude)로 나누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케네스 클라크(1903~83)는 ‘누드는 교양을 동반하는 사유의 결과물’이라 했다. 이는 오랜 세월 누드의 역사를 이룬 서양문화의 산물이기도 했다. 나체화 부재의 한국회화사에서 김관호의 등장은 영광 이전에 좌절과 상처를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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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김관호의 조선미술전 출품작 ‘호수’ 역시 여성 누드화로 파문을 일으켰다. ‘벌거벗은 여인’ 그림은 유교 사회의 금기를 깬 까닭에 대중과 소통할 수 없었고 천재화가는 결국 10년 남짓 만에 붓을 꺾고 말았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동우(東愚) 김관호(1890~1959). 그는 “5척8촌의 큰 키에 심청색 미술학교 제복을 입었고 귀공자 같은 호남자. 처음엔 공업을 배우려고 했는데 숙부가 불허했고, 반면 미술은 허락했더라”(<매일신보> 1916년 4월2일). 졸업미전에 출품한 <자화상>은 준수한 얼굴을 화면 가득 그린 작품이다. 털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다. 신문 기사처럼 ‘호남’의 풍모였다. 김관호 역사에서 1916년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추가해야 한다. 그해 12월 평양에서 개인전도 열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유화 개인전’ 기록과 더불어 화려한 귀국이었다. 평양 재향군인회 연무장 건물에서 개최한 개인전은 50점의 작품을 진열했다. 내용은 주로 평양 일대의 풍경화였다. 이 전시에 대하여 평양 유지들은 작품을 구입하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유교문화의 특성과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는 김관호의 작가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1920년대 말 김관호는 삭성회(朔星會) 활동을 접으면서, 붓도 꺾었다. 불과 10년가량의 미술활동이었다. 그 결과는 천재 화가의 좌절이었다. 소설가 김동인은 김관호의 좌절에 대하여 ‘사회 탓’이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결국 김관호는 폐인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끝내 손이 떨려 붓조차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선구자의 불행한 생애였다. 영광과 상처의 역정이었다. 선구자의 절필, 이는 김관호나 김찬영이나 비슷한 경로를 보인 사회 현상이기도 했다. 다음은 김병기 화가의 증언이다.

“김관호 선생은 우리 집과 같은 동네인 중성사거리의 북쪽에서 살았다. 그는 호리호리하면서 키가 컸다. 미남형이면서, 승려처럼 민머리를 좋아했고, 찰리 채플린처럼 콧수염을 길렀다. 피부는 까만 편이나 눈동자만큼은 반짝반짝 빛났다. 평양 미술의 상징이었는데 절필 이후 조용히 지냈다. 실력파여서 늘 아쉽게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김찬영)도 마찬가지였다. 김관호의 동생(김정호)이 평양에서 제일 큰 목재상을 경영했다. 김관호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한때 그림을 그렸고, 작은아들네는 월남해서 미국으로 이민 갔다. 후손들을 미국에서 만난 적이 있다. 폐인이 되다시피 한 김관호는 고향에서 해방과 전쟁을 겪어야 했다. 김관호는 1950년대 후반 말년에 며느리에게 구술한 노트에서 “이 세상에서 머저리가 있으면 그것은 김관호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1935년께 도쿄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에 다닐 때, 아리시마 이쿠마 선생이 문화학원 입학을 추천했다. 그래서 입학 면접시험을 보러 갔는데 평양에서 왔다니까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부장 교수가 ‘김관호씨 잘 계시냐’고 안부부터 물었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인정하던 조선인 화가는 김관호뿐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평양 하면 김관호’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김관호 하면 평양 문화예술계의 간판처럼 대표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문화학원 유학 시절 집에 오갈 때 만나도 김관호는 나에게 한마디도 미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림 잘 그리고 있느냐, 어떤 그림 그리냐 등 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의식적으로 미술 이야기를 피했다.

나의 사촌형(김병선)이 평양에서 제일 큰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그 양식 건물 2층에 훌륭한 응접실이 있었다. 삭성회에서 쓰던 이젤 등 미술도구를 보관했던 곳이다. 사촌형은 오전 11시쯤 일어나 밤늦도록 한량이나 노가다들과 술판을 벌였다. 어울리는 패 가운데 그나마 지식인이라면 김관호가 유일했다. 그는 거의 고정 멤버 같았다. 화가 생활을 접고 김관호는 술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김관호는 명포수로도 유명했을 만큼 총을 잘 쐈다. 화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눈이 좋았고 명중률이 높았다. 평양의 대표적 포수였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오면 사촌형 등과 어울려 사냥을 갔다. 노루나 꿩을 잡아 왔다. 노루탕 잔치가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노린내 때문에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어린 나는 ‘노루탕을 먹지 않는 애’로 열외에 서 있었다. 뒤에 나이가 들어 먹고 싶기도 했는데 아무도 먹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꿩냉면 맛만큼은 일품이었다. 꿩은 냉면 양념 재료로 최고였다. 평양냉면은 꿩을 뼈까지 다져 이른바 꿩다대기를 넣어 만들었다.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미각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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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절필했던 김관호는 한국전쟁 이후 삭성회미술연구소 제자 최연해의 주선으로 화단에 복귀해 북조선예술총연맹 산하 미술동맹 중앙위원을 지내다 1959년 별세했다. 2001년 <한겨레>가 미국의 증손자를 통해 입수한 1945년 무렵의 김관호 사진과 평양의 맏며느리가 딸 김옥순에게 구술로 남긴 김관호 말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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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후 화단에 복귀한 김찬영은 말년까지 주로 평양의 정서를 담은 풍경화와 인물화를 남겼다. 하지만 초기작과 비교해 천재성은 퇴색했다는 평이다. 사진은 1956년 작품으로 알려진 ‘모란봉의 가을’.


김관호는 해방기에 다시 미술계에 나타났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재기해 평양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회갑의 나이에 성공한 재기였다. 하지만 그림은 힘이 빠져 있어, 젊은 시절의 영광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음은 평양 미술평론가의 김관호 세계에 대한 평가이다.

“김관호는 고향인 평양을 무척 사랑하였으며 평양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는 데 모든 창작적 열정을 쏟아부은 예술가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평양의 실경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이 소중히 간직되어 있고 세월과 더불어 새로이 변모되는 고향 평양의 모습들을 정서 깊고 특색 있게 그려내었다. (…) 조국에 대한 사랑은 그의 작품 고향 평양의 자연에 대한 형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화면에 묘사된 대상들에 대한 꾸밈없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이 필치마다 뜨겁게 체현되어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크지 않은 풍경화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조형화의 수법이 지극히 통속적인바 이것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고향, 평양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실하게 펼쳐내게 하였다. 평이한 구도 처리, 통일된 색조, 부드러운 붓질, 정리된 화면은 고향에 대한 창작가의 향토적 감정을 화폭에 구현하는 데 적극 이바지하였다.”(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4년)

녹취·집필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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