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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동대문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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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늘고, 젊어지고, 글로벌해졌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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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개관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2014년, 6만2692㎡ 부지에 총면적 8만6574㎡, 지하 3층과 지상 4층 규모로 문을 연 DDP는 동대문을 넘어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DDP의 개관은 동대문 지역의 문화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샤넬, 디올 등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패션쇼가 DDP에서 잇달아 열리며 저가 의류시장으로 대표되던 동대문이 명품 패션 브랜드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매년 3월과 10월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에는 트렌디한 패션 피플들이 DDP를 가득 메우며 화려한 볼거리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지금 DDP에는 세계적 디자이너의 전시장, 예술작품과 같은 건축물 앞에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려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동대문에 사람이 늘었다
DDP가 서울의 새 랜드마크가 되면서 동대문 일대가 들썩이고 있다. 오랜 경기 침체로 유동 인구가 줄었던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DDP를 찾는 이들을 붙잡기 위해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두타, 제일평화시장 등 동대문의 터줏대감들이 DDP 오픈 후 대대적인 리뉴얼을 했고, 현대시티아울렛 동대문점, 에이피엠 플레이스 등 쇼핑몰들이 화려하게 오픈했다. 쉐이크쉑(쉑쉑버거), 미즈컨테이너 등 강남과 홍대 등에서 줄 서서 먹는 맛집들이 동대문에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에 따르면 지하철 2·4·5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2016년 승하차 인원은 DDP 개관 전인 2013년과 비교해 16% 상승했다. 2016년 DDP를 방문한 약 800만 명이 동대문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동대문이 젊어졌다
동대문은 1998년 밀리오레, 1999년 두타가 잇달아 문을 열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쇼핑 명소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SPA 브랜드의 등장과 온라인쇼핑몰의 활성화로 동대문 상권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젊은 층들이 홍대, 이태원 등으로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아갔고 동대문은 젊음의 열기를 잃었다.

2014년 3월 DDP의 등장은 동대문의 이미지 변신에 큰 역할을 했다. 깔끔하고 미래적인 느낌을 주는 외관의 DDP가 동대문 한가운데 자리 잡으면서 지역의 느낌을 변화시켰다. DDP는 오픈과 동시에 서울패션위크를 개최하며 전국의 패션 피플을 DDP로 집합시켰고 같은 해 8월에 ‘문화 샤넬전: 장소의 정신’을 개최해 세계 각국에 동대문과 DDP의 이름을 널리 각인시켰다.

이제 DDP는 패션과 SNS에 민감한 젊은 층이 즐겨 찾는 문화 놀이터가 되었다. DDP의 독특한 외관과 개성 있는 콘텐츠는 수시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젊은 층의 감성에 적중했다. DDP가 동대문에 젊음의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동대문이 글로벌해졌다
패션쇼부터 신제품 론칭쇼까지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DDP에서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DDP에서 패션쇼와 전시회를 열었던 프랑스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는 “한국은 에너지로 가득 찬 나라이며 특히 DDP는 한국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라고 전했다. DDP에서는 또한 세계그래픽연맹총회, 세계도시기후환경총회, 세계건축대회 등 글로벌 명사를 초청하는 대규모 행사도 개최되고 있다. DDP를 찾는 외국인이 늘면서 동대문은 글로벌 관광명소가 되었다.

DDP 개관에 발맞춰 특1급 호텔인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이 동대문에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호텔 20여 개가 신규 오픈하거나 리뉴얼 오픈했다. DDP를 배경으로 촬영된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동대문을 찾으며 한류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또한 지난해 3월 DDP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심장 마비로 별세하면서, DDP는 자하 하디드의 유작이 되어 전 세계 건축학도들의 성지가 되었다.

'이간수문' 등 서울 600년 역사도 품어

DDP는 특히 동대문과 서울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물길이 성곽 밑을 관통해 흘러가도록 한 통로인 ‘이간수문’, 왕의 호위를 담당하던 훈련도감 군사들이 거처했던 ‘하도감’ 등이 자리했다. 2008년 11월, DDP 공사 도중 조선시대 유적들이 발견되어 1년 동안 공사를 중단해야 했다. 이때 발굴된 유적은 현재 어울림광장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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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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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이전에 자리했던 동대문운동장도 동대문의 오랜 역사를 대변한다.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경성운동장’에서 시작된다. 광복 후에는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쓰이기도 했다. 임시 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회와 백범 김구의 국민장이 열렸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고교 야구 대회가 열릴 때마다 관중석이 만원을 이룰 정도로 동대문운동장의 인기는 뜨거웠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첫 시즌 개막전이 열린 곳도 동대문운동장이다. 하지만 이후 현대적인 체육시설들이 곳곳에 문을 열면서 동대문운동장은 사람의 발길이 줄었고 점점 노후화되었다. 운동장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자 노점상들이 몰려들어 동대문풍물벼룩시장과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결국 2007년 철거를 시작했다.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해 동대문운동장 조명탑과 성화봉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전범준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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