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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화)

"數의 세계 들어온 당신, 내 작품의 일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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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현미 작가 개인전 '수의 시선'

0부터 9의 숫자 조형물 만들고 설치해 사진 찍는 독특한 작업… 달리·호퍼의 몽환적 회화 같아

시인 김남조의 며느리

유현미(53)가 들려준 야구선수 박찬호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얼굴과 몸에 물감을 입혀 설치물로 만드는 '자화상' 작업을 할 때, 박 선수와 함께한 협업이다.

"감기가 잔뜩 걸려 작업실로 왔어요. 물감을 바르면 더 추워진다고 했더니 10분만 시간을 달래요. 그러더니 '이제 됐다'고 하더군요. 게임 모드로 전환했다면서. 수십만 관중이 야유를 보내도 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임 모드! 분장을 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을 때 박찬호 선수가 막 우는 거예요. '난 거지왕처럼 살았다'면서. 1등을 달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감, 비애감이랄까요. 2등이 되는 순간 자신을 패배자, 거지로 느껴야 하는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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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현미가 자신의 설치 작품‘수학자의 시선’속에 들어가 있다. 온통 하얗게 칠한 높이 6m 공간에 숫자 조형물과 사다리, 검정 테이프로 연출한 벽면 드로잉이 어우러져 흑백 회화 같다. /장련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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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14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유현미 개인전 '수(數)의 시선'은 그 연장선에 있다. 숫자가 가진 조형미, 저마다의 상징을 의인화시켜 미술관을 환상의 공간으로 연출했다. "누구나 1을 좋아하죠. 최고의 숫자니까. 그런데 한편으론 불행한 숫자예요. 명예롭지만 자신을 뺀 나머지를 패자로 만드는 이기적인 숫자! 반면 2는 여성스러워요. 한발 물러서 있고, 배려하고요. 5는 어떤가요? '중용'을 뜻하는 동시에 조형미에서 가장 완벽한 숫자 아닌가요?"

수가 이 세상을 덮고 있다는 상상에서 작업은 출발했다. "숫자는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예요. 힘도 막강하죠. 주민번호, 전화번호만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불과 비슷하죠. 좋게 활용하면 한없이 좋지만 나쁘게 이용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어린왕자'에도 나오잖아요. 별들의 숫자를 세는, 수에 집착하는 어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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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미술관 유현미 작품 숫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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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0부터 9까지 숫자 조형물을 만든 뒤 이들을 의자나 식탁, 사다리 같은 사물들과 함께 공간에 설치한다. 공간의 벽과 바닥에도 색을 칠하고 명암을 입힌 뒤 숫자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이 유현미 방식이다. 사진을 프린트해 액자에 걸면 살바도르 달리 혹은 에드워드 호퍼 같은 몽환적인 '회화'가 탄생한다.

'1984'는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24시간 감시당하는 현대사회를 은유했다. '433'은 4분 33초 동안 연주하지 않고 악보 넘기는 소리, 관객의 기침소리 등으로 음악을 작곡한 존 케이지에게 경의를 표한 작업이다. 전시 타이틀이 된 '수학자의 시선'은 관객이 참여하는 설치 프로젝트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나오듯 수학박사의 머릿속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하며 만든 설치작품이에요. 황홀하고 아름다운 수로 이뤄진 건축물이랄까. 관객이 이 안으로 들어와 셀카를 찍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드로잉 작품이 되지요."

회화, 조각, 사진, 영상을 모두 동원해 작업하기 시작한 건 서울대 조소과 대학원 시절부터다. "팔레트에 짜놓은 여러 색깔 물감 같은 거죠. 필요에 따라 조각과 회화를 갖다 쓸 수 있고, 소설과 영상을 갖다 쓰기도 해요. 여러 가지 재료를 넣었을 때 나는, 뭐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국물맛?"

시와 소설, 동화도 쓰며 미술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유현미는 시인 김남조와 작고한 조각가 김세중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블루'라는 시를 써서 보여드렸더니 어머님이 아예 시를 써보라고 하셔서 기겁했지요(웃음)." 남편은 설치미술가 김범(54)으로 뉴욕대에서 함께 유학했다.

독일의 세계적인 아트북출판사 '핫제 칸즈'에서 사진집을 출간했을 만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유현미 작품엔 동심이 물씬 배어난다. "수학을 잘했냐고요? 전혀요. 상극이었죠. 수업시간에 22라는 숫자를 오리로 그렸다가 선생님께 호되게 야단맞은 추억은 있어요, 하하! 제 작품 보고 '뭔가 이상한데? 조금 다른데?' 하고 머리를 갸웃거린다면 정말 좋겠어요." (02)736-4371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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