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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사기꾼은 잡혔지만…” 2년째 눈물 짓는 탈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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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잘나갈 땐 ‘우수기업 선정’… 투자 피해자에겐 나몰라라



경향신문

6월 9일, 한성무역 사기 피해자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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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0일, 탈북자 김미영씨(가명·50대)는 지인이 걸어온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김씨가 3억여원을 투자한 한성무역의 한필수 대표(51)가 전날 중국 출장 중 갑자기 호텔방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처음에 김씨는 탈북자인 한 대표가 중국 공안에 체포된 게 아닌가 걱정했다. 김씨는 “탈북자들은 모두 ‘25’로 시작하는 똑같은 주민번호 뒷자리를 받기 때문에 중국 공안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주민번호 때문에 공안에 붙잡혀 북한에 강제송환당한 탈북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 대표가 투자금을 들고 중국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쪽으로 한성무역 직원들과 투자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투자자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언론에서는 ‘탈북 기업인이 탈북자들을 등쳐먹었다’는 취지의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필수 대표는 한때 탈북자들 사이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다. 한 대표는 1996년 탈북 후 한 차례 강제송환됐다가 2002년 재탈북에 성공했다. 이듬해 한 대표는 한성무역을 세웠고, 중국에 매달 20억원어치 이상을 수출하는 등 ‘성공한 탈북 기업인’으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중소기업청은 두 차례에 걸쳐 한성무역을 ‘경영혁신형 우수중소기업’으로 선정했다. 한성무역 직원 대부분이 탈북자였고, 한 대표 스스로 “앞으로 한성무역에 탈북자 3000명을 고용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지난해 4월 중국 공안에 붙잡혀 한국으로 송환돼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지난 4월 22일, 1심에서 한 대표는 징역 7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2012년 초, 김씨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ㄱ씨가 자신을 ‘한성무역 영업사원’이라고 소개하며 김씨에게 접근했다. ㄱ씨는 한성무역의 장점을 소개하며 투자를 요청했지만 김씨는 “생각해보겠다”며 거절했다. 이미 김씨는 10년째 남한에서 생활하면서 쉽게 돈을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한 탈북자들을 많이 본 터였다. 이런 김씨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인 것은 서울 노원경찰서 안보강연이었다. 2012년 6월 26일, 한 대표는 노원경찰서 강당에서 탈북자 400여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김씨는 “그날 한 대표가 자기 회사에 투자하면 매월 1.5%의 이자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었다”며 “그 전까지는 믿지 않다가 경찰관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말을 하니 점점 믿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돈뿐만 아니라 남한에서 새로 만난 남편의 돈까지 총 3억여원을 한성무역에 투자했다. 첫 투자는 2013년 9월에 이뤄졌다. 김씨는 1억5000만원을 12개월간 한성무역에 투자하는 대신 매월 1.5%의 이자를 받기로 했다. 실제로 이자가 지급됐고, 기존 직장에서 퇴직했던 남편도 한성무역에 재취업됐다. 한성무역에 더 신뢰를 갖게 된 김씨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1억6000만원을 추가로 투자했다.

2014년 3월 말, 한필수 대표의 잠적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였다. 기사가 나온 이후 김씨는 며칠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가족 앞에서도 늘상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김씨의 딸이 엄마에게 “진지한 얘기좀 하자”며 불렀다. 김씨의 딸 손 안의 핸드폰 화면에는 한필수 대표 사건 기사가 떠 있었다. 김씨는 “그날 딸애가 나한테 ‘이 회사, 엄마가 믿어 보라며 투자한 곳 아냐? 미쳤어, 제정신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날 이후 자식들은 나를 엄마로 취급해주지도 않고 있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남편과도 결국 이혼하게 된 김씨는 원래 살던 노원구의 집을 떠나 맨 처음 정착했던 충청도의 한 도시에서 홀로 살고 있다.

부산에 거주하는 탈북자 이혜숙씨(가명·60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씨는 한 대표가 잠적하기 직전인 2014년 3월 초에 한성무역에 3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그에게도 역시 ‘영업사원’이 찾아왔다. 이씨는 “영업사원 ㄴ씨가 한필수는 ‘제2의 정주영’이다, 통일부가 다 밀어주는 사람이고, 문제가 생기면 투자금은 정부에서 책임을 진다면서 꼬드겼다. 하지만 매월 이자를 준다는 조건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처음엔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ㄴ씨가 한 달 가까이 거의 매일 부산 탈북자 모임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씨는 “ㄴ씨가 ‘나도 진작에 투자해서 수억원을 벌었다’며 계속 우리들을 설득했다. 우리 사이에 제일 똑똑하고 남한 사회에 적응도 잘했다는 사람부터 전세금을 빼서 투자를 하는 등 분위기가 점점 변해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5억원, 또 다른 이는 1억7000만원을 투자했다. 이씨도 남들만큼은 한성무역에 투자금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파트 보증금까지 뺐다. 딸을 설득해 산업재해로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사위의 보험금까지 합쳐 3억원가량을 만들었다. 2014년 3월 5일, 이씨는 월 1.5%의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투자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불과 2주 만에 한 대표는 자취를 감췄다.

한성무역 피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탈북자들을 포함해 약 230명이 총 160여억원의 투자금을 떼였다. 한 대표가 자취를 감춘 직후, 한성무역 피해자들은 비상대책위를 결성하고 공장을 청산해 투자금을 돌려받으려 했다. 한 대표가 금융권에 진 200억원이 넘는 채무를 먼저 변상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피해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가 났던 시기로 기억한다. 비대위에서 일하던 몇 사람이 ‘공장 집기라도 가져가야겠다’며 막무가내로 쳐들어왔다. 공장을 지키던 피해자들과 뒤엉켜서 몸싸움도 일어났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비대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자, 이씨에게 투자를 권했던 ㄴ씨가 “나도 한성무역 투자 피해자다”라며 나섰다. 이혜숙씨는 “한필수가 중국에 있는 동안 민사소송이라도 먼저 제기하려고 했는데, ㄴ씨가 자신이 한 대표와 일했던 만큼 한 대표를 설득해 돈을 받아내겠다며 소송을 질질 끌었다”고 말했다. 이도 저도 되지 않자 피해자들은 종편 방송에 출연한 바 있는 탈북자 ㄷ씨를 대표로 활동을 이어갔다. 김미영씨는 “탈북자 사회에서는 유명인사고, 맨 처음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자고 제안하는 등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ㄷ씨가 있다고 해서 특별히 언론에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해도 ‘여기서 살기 힘들면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막말을 하는 등 갈등만 빚었다”고 말했다.

한성무역 피해자들은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을 구제해달라”며 나섰다. 9일 한성무역 사기 탈북민 피해대책위는 서울중앙지법에 대한민국을 상대로 1원의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제출했다. 소장에서 피해자들은 “탈북자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빠져 있고 3명이 실의에 빠져 자살했다”며 “정부의 적절한 대책이 없으면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대책위는 한 대표가 경찰서에서 강연한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피해대책위의 설명은 이렇다. 탈북자들이 처음 한국에 오면 하나원에서 3개월간 교육을 받는다. 이후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현지 적응이나 취업 지원을 도와주는 것이 경찰이다. 또한 탈북자들을 관할하는 경찰서의 탈북자 담당 경찰관이 수시로 탈북자들에게 연락을 해 온다. 김씨는 “탈북자들은 남한사회 정착 초기부터 도움을 받았던 경찰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이 일을 당하기 전에는 경찰관의 말이라면 부모님 말처럼 믿었다”고 말했다.

또한 피해대책위는 국가정보원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이 법원에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지난해 5월 한 대표가 구속됐을 당시, 국정원이 2012년부터 한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사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한 대표가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소장에서 피해자들은 “국정원은 한필수가 사기를 저지른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국정원은 한필수를 불러 경고하거나 탈북민들에게 주의를 줄 의무가 있으나 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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