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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원세훈 '같은 증거 다른 판단'…"교묘한 대법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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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살롱<73>]대법,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파기환송…판단 근거는?]

머니투데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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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재판에서 증거로 제시된 이메일 파일들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와 상고심 재판부가 각기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일찍이 항소심 재판부는 그 파일들의 증거 능력이 인정된다는 전제로 피고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요. 대법원은 파일들의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유·무죄의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지난 16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대선개입 혐의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의 판결 이야기입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며 "검찰이 제출한 일부 파일들의 증거능력을 (원심이)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매일 반복적으로 업무상 필요에 의해 작성" vs "단편적이고 조악…업무와 무관한 걸로 보여"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대법원이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파일은 '425지논'과 '시큐리티'라는 이름의 메모장 텍스트 파일입니다. '425지논' 파일에는 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등의 정치적 성향의 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큐리티' 파일에는 국정원 심리전단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과 비밀번호, 활동 내용 등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 두 파일은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모씨의 이메일 계정에서 발견됐고, 검찰은 이를 근거로 국정원이 정치·대선 개입을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 파일들을 자신이 작성했다고 시인했던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갑자기 말을 바꿨습니다. 이에 1심은 이 파일들을 기초로 판단한 트위터 글들을 증거에서 배제했고 원 전 원장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을 유죄로 판단하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형사소송법상 작성자가 작성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디지털 문서는 증거로 쓰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315조를 근거로 해당 파일들의 증거능력을 인정했습니다. 현행 형소법상 '업무상 필요에 따라 작성한 통상문서' 또는 '신용할 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두 파일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 것입니다. 결국 항소심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된 트위터 계정은 1심에 비해 늘어났고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원 전 원장이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판단,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문서들이 '내게 보낸 메일함'에서 발견됐고 매일 반복적으로 업무상 필요에 의해 작성됐다고 봤습니다. 또 문서 내용 중 일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명되지 않았거나 일부 사적인 영역에 대한 기재가 있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증거능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같은 항소심 판단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똑같은 파일을 두고 해석을 달리한 것입니다. 재판부는 해당 파일들의 내용이 "단편적이고 조악하다" "업무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도 질서 없이 나열돼 있어 신용성을 보장할 수 없다"라며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같은 증거를 두고 다른 해석을 내린 재판부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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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 16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혐의로 항소심에서 실형을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상고심 전원합의체 선고에 앞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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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너무 좁게 법리 적용"…"검찰 기소가 미흡" 비판도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 법조계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내용이 질서 없이 나열돼 있거나 조악하게 쓰여 있더라도 개인이 업무상 쓴 문서라면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며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너무 엄격하고 좁게 법리를 적용한 것 같다"고 비판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증거의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유·무죄의 판단을 보류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교묘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원 전 원장의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 대법원이 실체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한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며 "대법원은 현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는 어려운 판단의 책임을 다시 서울고법에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검찰의 기소 자체가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와 선거에 개입했느냐는 것"이라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하는데 핵심이 되는 증거가 미흡했던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원 전 원장의 지시로 국정원이 정치와 대선에 개입했는지에 대한 최종 판단은 미뤄졌습니다. 검찰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판결문을 면밀하게 분석한 뒤 공소 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대법원이 핵심 증거의 능력을 부인한 이상 파기환송심에서 이 증거 능력이 다시 인정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시 말해 원 전 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1심에서처럼 무죄로 판단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원 전 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인정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 파일들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국정원이 사용한 것으로 인정되는 트위터 계정들이 여전히 일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검찰과 원 전 원장 측의 법정 공방은 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의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와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무거운 의혹, 과연 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파기환송심을 맡게 될 재판부의 고민은 더 커질 것 같습니다.

김만배 기자 mbkim@mt.co.kr, 이태성 기자 lts320@mt.co.kr, 양성희 기자 yang@mt.co.kr, 황재하 기자 jaejae32@mt.co.kr, 한정수 기자 jeongsu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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