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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레이더P] `똑부놀` 유승민, 들판에 홀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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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한 번으로 장안의 화제가 됐습니다. 야당 보좌관으로 오래 일한 한 지인은 "(연설문) 밑줄을 쳐가며 읽고 읽어도 멋지다"며 "사람을 발견하는 흥분을 느꼈다"고 극찬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야당은 '기습'을 당했습니다. 시쳇말로 "훅 들어왔다"랄까요.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진보'를 독식하게 된 새정치민주연합이 짐짓 여유롭게 우클릭에 나서는 순간, 진보의 어젠더를 유 원내대표가 잠식했습니다.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에 오르기까지 오랜 기간 절치부심했습니다. 13·14대 의원을 지낸 유수호 의원의 아들이자 유학파 '도련님' 이미지지만 큰 꿈을 향해 땅을 단단히 다지고 한걸음씩 옮겨온 스타일입니다. 지난 2월 원내대표 선거에 나섰을 때는 초선 의원들까지 1대1로 만나 몇 시간 동안 설득한 일이 있을 정도로 행보가 치밀합니다.

40대 초반에 이회창 당시 대권 후보의 브레인으로 정치에 입문해서는 어금니가 빠질 정도로 정력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최근 '유승민 측근'으로 분류되는 의원 몇 사람에게 들었던 얘기를 살짝 전합니다. A의원은 유 원내대표를 가리켜 '똑부놀'이라고 정의합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데, 놀기까지 잘해 부러울 정도라는 표현입니다.

유 원내대표를 지금은 40대 후반~50대 초반이 된 '우파 386' 후배들이 잘 따르는 배경엔 마지막 글자 '놀'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딱딱하고 건조할 것 같지만 저녁 자리에선 전혀 다른 리더십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젊었을 때 성향은 어땠을까요. 그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DJ정부가 집권해 이른바 빅딜을 통한 재벌 구조조정에 착수하게 됩니다. DJ 측근인 A원장이 부임해 빅딜을 위한 틀을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지만, 유 원내대표는 재벌 개혁은 필요하지만 위기의 주범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는 외부 기고로 항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감봉 조치까지 받자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후문입니다.

B의원은 "위스콘신대는 사회학 쪽은 전형적 좌파지만 경제학과는 좌파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전했습니다.

유 원내대표의 발언을 보면 신자유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그렇다고 케인지언(정부 개입과 경기 부양 강조)도 아닙니다. 재벌의 변화를 말하지만 재벌의 해체를 말하진 않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말하지만 그렇다고 '리버럴'은 아닙니다.

유학을 할 때도 '공부벌레'라기보다 동료들과 술자리를 하며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C의원이 유 원내대표를 '액티비스트(activist)'라고 정의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겁니다.

그럼 유 원내대표가 더 큰 꿈을 꿀 수 있을까요. 1958년 개띠이니 벌써 57세입니다. 나이로는 차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오세훈 안희정 원희룡 남경필 등보다 위입니다. 지역 기반은 TK(대구경북)고, 정치 이념은 중도보수로 보입니다.

유 원내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유승민과 안희정이 대선에서 맞붙는 그림을 그려 보자. 역대 대선 중 가장 행복한 선거가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국회 연설에서 유 원내대표는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매일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진다"며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고 싶다. 15년 전 제가 보수당에 입당한 것은 제가 꿈 꾸는 보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가 자신의 지향점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른바 '서민' '중산층'이 그의 진정성을 알아주기엔 그동안 새누리당의 걸어온 길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리고 유 원내대표가 걸어온 길도 아직 확신을 주기엔 부족합니다.

그는 이제 들판을 앞서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그가 걷는 길에 얼마나 많은 여당 의원들이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길이 국민의 마음으로 향해 갈 수 있을까요. 유 원내대표가 '책사' 시대를 마치고 새로운 '리더'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

[신헌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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