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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길을 찾아서] 광주 학살때 ‘도바리 치기’ 죄책감 한켠엔… / 이룰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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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6)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 때,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다 공수부대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있을 때, 나는 ‘도바리 치기’에만 급급했던 데 대해 송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민주화운동가들이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만약 그때 도망치지 않고 잡혀갔더라면, 보안사가 지휘했던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고문이라는 고문은 다 받고 끝내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강제 자필 진술서를 쓰고 군사법정에 섰을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은 “5·17 쿠데타는, 군사정변의 일반 원칙을 깨고 예고된 상태에서 반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쿠데타는 79년 12·12 군사반란에서부터 80년 5월17일까지 5개월이 걸렸다”고 지적한다.(‘1980년 정치지도자들의 정세인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토론회 자료집)

그는 “쿠데타 세력은 민주세력이 분열할 때를 거사의 기회로 삼는다. ‘4월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61년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열했을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또 72년 신민당이 유진산-김홍일로 분열되었을 때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 세력은 80년 봄 김영삼-김대중 두 세력이 갈라졌을 때 ‘5·17’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참된 지식, 즉 지혜라는 것은 현재에 대한 올바른 진단과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80년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은 모두 지혜가 부족했다. ‘양 김씨’ 역시 당시 정치적으로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박정희가 사라지자 “다음 정권은 내 차지”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전두환 일당의 신군부 세력 등장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는 재야세력도 남 탓 할 처지가 못 된다. 더구나 80년 4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미국 정보기관들의 판단에 의거해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씨’는 차기 대통령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도했고, 그렇다면 미국은 한국의 다음 정권을 군부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한국의 재야인사들 또한 군부의 집권을 어떻게 저지할지에 대한 대비책을 모색하지 못했다.

80년 5월에야 군부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양 김씨는 오히려 4월14~15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세력에게 “군부에게 군대를 출동시킬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말리고 있었다. 그 짧았던 ‘서울의 봄’에 양 김씨는 상이한 태도를 보였다. “김대중씨는 80년 2월 중순 신군부 측으로부터 ‘협조’를 조건으로 사면·복권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신군부의 목표가 정권 탈취에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윤보선·문익환 등 재야의 신군부 퇴진 요구 성명에 서명을 거부하고, 학생 노동자들에게는 과격 행동으로 빌미를 주지 않도록 당부했다. 김영삼씨의 시국 인식은 크게 달랐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스칼라피노가 직접 자신을 찾아와 ‘최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볼 때 군부의 재등장이 우려된다. 미국 내에선 이를 거의 공지의 사실로 생각할 정도’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이를 일축했다. 방금 10·26의 참상을 목격한 군인들이 다시 그 길을 걸을 리는 없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꿀 만한 경고는 아니었다.”(김삼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토론회 자료집)

당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저항하기로 미리 대비한 대학생들은 광주지역밖에 없었다. 고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의 제의로 “만약 군대가 출동하더라도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자”고 했고, 광주의 대학생들은 그 약속을 지켰다. 이에 반해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부는 5월15일 서울역 일대 시위에 무려 10만명이 운집했음에도 학교로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숭실대 학생회장이던 윤여연은 심재철 서울대 학생회장이 “효창운동장에 군대가 진주하는 등 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서 회군하기로 했다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고 회상했다.

사실 군대의 작전에서 가장 섬멸하기 쉬운 적군은 두려움에 떨어 후퇴하거나 도망치는 오합지졸이다. ‘5·17’ 당시 서울지역 학생운동의 서울역 회군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후퇴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지역 말고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아주 쉽게 정권을 잡은 이유는 재야세력과 야당 정치인들의 아마추어적인 낙관론과, 그 뒤에 깔린 군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5·17 군사쿠데타’는 정치인들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한반도의 평화, 국제정치, 군사학까지 총체적 탐구를 해야만 제대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 무인기 논란에서 보듯, 이제 우리 국민들은 선동이 아니라 진실을 캐물어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인문학 강좌와 풀뿌리 지역언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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