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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세 번의 죽음 문턱, 94살에야 4·3 무죄…“날 증명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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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0일 제주지방법원에 나온 강순주(94)씨.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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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30일 오후 4·3 재심 재판이 열린 제주지방법원 20호 법정.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온 올해 아흔넷의 강순주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강씨는 전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판장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70여년 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중산간 마을 가시리의 마을 안길, 그 길에서 죽어간 친척, 6·25전쟁 시기 자원입대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이날 법정에 나온 그의 목소리는 가끔은 물기에 젖어 떨렸고, 복받쳤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놨던 그 날의 기억의 편린들을 논리정연하게 끄집어냈다.





첫 고비, 한국말도 못하는 내가 피신하다 잠든 순간





“저는 4·3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 말도 제대로 못 했고, 풍속도 전혀 몰랐습니다. 게다가 민가가 있는 마을에서 1시간 정도는 가야 하는 변두리에 살았는데 길이 험하고 야간에는 통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 가시리로 돌아온 그는 마을에서는 꽤 떨어진 외곽지역 할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4·3 일어난 초기만 해도 4·3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다. 그런 그가 4·3을 겪은 것은 1948년 가을이었다.



가시리 마을이 중산간 마을인 데다 강씨는 마을에서도 외곽에 살아 바깥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어느 날 길가에 죽어있는 종손을 목격했다. 겁이 났다. 몸을 숨겨야 했다. 마을이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피신생활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고, 토벌대에 걸렸다. 총을 겨눈 군인 2명이 “도망가라”고 했다. 한참 지나 사정거리에서 멀어지자 그때야 공포를 쏘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네 사람과 함께 피신생활을 하다 경찰에 체포돼 제주읍내 농업학교에 수용돼 몇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풀려났다. 이제 더는 붙잡힐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두번째 고비…“한 일이 없기 때문에 죽여달라 했다”





강씨는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 다시 붙잡혔다. 1949년의 일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산지항(제주항) 앞에 있는 주정공장에 수용된 강씨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천장에 매달리고, 전기고문을 받았다. 카빈총을 눈앞에 들이대며 바른말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강씨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기에 하지 않았다며 끝까지 버텼다.



“저는 (경찰 조사 때)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합니다.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지만 못 찍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저를 죽여달라고 했습니다. 고문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어서 저를 죽여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는 1950년 5월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죄 위반 명목으로 금고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 듯 강씨는 울먹였다.





총살 명령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주민 구한 경찰서장





“제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면 그 원인이 있을 텐데 법정에 오기 전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재판을 받고 판사님 앞에 가서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납니다.”



한겨레

30일 제주4·3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강순주씨.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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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직후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의 바람이 몰아쳤다. 그는 그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그는 마을에 있다가 예비검속돼 성산포경찰서에 붙들려갔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비검속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되거나 바다에 수장돼 행방불명됐다.



그러나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1950년 8월 말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 공문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뒤 명령을 거부하고, 200여명의 주민을 살렸다. 문 서장은 강씨의 생명의 은인이다.





전사하기 위해 한국전쟁 참전





절망의 끝에서 살아났지만 막막했다. 언젠가 또다시 끌려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 내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가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동안 눈물을 흘리며 생활하다가 지금 이북(북한)하고 싸움(전쟁)할 때니까 내가 군에 가서 죽는다면 내 결백이 증명되지 않을까 해서 지원했습니다.”



강씨의 발언에 방청석에 앉았던 이들도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훔쳤다. 강씨는 1952년 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강씨는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세상이 내게 이럴까. 국가를 많이 원망도 했다”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군에 가서 전사한다면 최소한 나의 떳떳함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씨는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최전방을 지원해 전방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투입되는 보충대대로 배속됐으나, 그곳에서도 그를 좋게 본 대대장을 만나 군 생활을 이어갔다.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은 이날 강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고, 변호인도 강씨의 무죄를 요청했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방선옥)는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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