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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칠레, 단돈 ‘50원’이 폭발시킨 ‘불평등’ 격분…비상사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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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산티아고 시위 폭력 치달아…8명 사망

피노체트 이후 30년만에 수도에 군병력 배치

지하철 요금 인상에 촉발…이면엔 ‘빈부격차’

“부자 대통령 ‘공공지출 감축’에 대중적 분노”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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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지하철 요금 인상이 촉발한 칠레 국민의 시위가 갈수록 격화하면서, 주말 이틀 새 시위에서 8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칠레 정부는 수도 산티아고에 발령한 비상사태를 인근 도시들로 확대하고 야간통행금지 시간도 연장했다. 산티아고 주요 도로에는 군인과 경찰 1만여명과 탱크들이 배치됐다. 칠레에서 수도 한복판에 중무장 군 병력이 주둔하고 통행금지를 시행하는 건 민중들의 끈질긴 민주화 투쟁으로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1974~1990)이 몰락한 이후 거의 30년만이다.

산티아고에선 전날 밤에 이어 20일에도 격분한 일부 시위대가 월마트 아울렛등 수십곳의 상점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등 시위가 폭력 사태로 번졌으며, 불에 탄 슈퍼마켓과 물류창고에서 모두 8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에이피>(AP) 통신이 현지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산티아고 시내 주요도로는 교통이 마비됐으며, 여객기 승무원들이 제때 공항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항공편 운항의 취소도 잇따랐다. 치안 당국은 19~20일 주말새 시위자 1640여명이 폭력 등의 혐의로 체포됐다고 밝혔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부터 다음날 6시까지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밤늦게 산티아고 시내 군 사령부에서 긴급성명을 내어, 비상사태를 산티아고 북쪽과 남쪽의 인근 도시들로 확대하고 군 병력도 그에 따라 확대 배치한다고 발표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그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성명에서 “우리는 폭력을 아무런 제한 없이 사용하려는 강력한 적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며 “나는 모든 동포들에게 폭력과 범죄에 맞선 이 전투에서 단합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시위대 일부의 폭력 행위를 빌미로 시위에 참여한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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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째 이어진 칠레 시위는 지하철 요금 인상이 기폭제가 됐다. 칠레 정부는 최근 유가 인상과 페소화 가치 하락을 이유로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을 800칠레페소(약 1320원)에서 830칠레페소(약 1370원)로 올렸다. 주앙 안드레스 경제장관은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오전 6~7시 조조할인 요금을 이용하라”고 했다가 분노를 키웠다. 산티아고 지하철의 평일 하루 이용객은 240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칠레 국민이 격분한 것은 우리 돈으로 겨우 50원가량의 요금 인상 때문만은 아니다. 남미위성방송 <텔레수르>는 20일 “지하철 요금 시위는 피녜라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출범하면서 임기 4년 동안 5억달러(약 5850억원)의 공공지출 삭감 계획을 발표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대중의 분노를 반영한다”고 짚었다.

칠레는 남미에서 유일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2만5168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갈수록 심화하는 빈부 격차와 불평등, 서민층에겐 버거운 생활 물가 등 사회·경제적 문제가 드리워졌다. 지하철로 통학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처음 시작한 시위에 점차 서민층이 가세하고 정부가 19일 밤 지하철 요금 인상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는데도 다음날 시위가 되레 격화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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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녜라 대통령은 20일 치안 및 사법 당국 수장들과 긴급 회동을 마친 뒤 “우리 사회에 존속해온 과도한 불평등과 착취를 줄이기 위한 위기 해결책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피녜라 대통령은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이자, 지상파 티브이 방송국 지분 100%를 비롯해 항공사와 축구 클럽 등의 지분을 소유한 기업가 출신이다. 2010년 초 대선 결선에서 이 나라 최초의 억만장자 대통령에 당선해 4년 임기를 마쳤다. 다음 선거에서 의사 출신의 중도좌파 정치인 미쳴 바첼레트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가 2017년 대선에서 4년만에 복귀했다.

미국 티브이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주요 배역으로 유명한 칠레 출신의 미국 배우 페드로 파스칼은 20일 트위터에 “칠레 경제는 착실히 성장해왔지만 역설적으로 빈곤도 늘었다. 누가 돈을 가져가느냐?”, “은행과 금융기관들은 대출이자를 연간 47%나 떼어 간다. 유럽이라면 경영진 모두 고리대금업으로 감옥에 갈 일이다” 같은 글을 잇따라 올리며 칠레 시위를 지지했다. 파스칼은 산티아고 태생으로, 부모는 1970년 민주선거로 집권한 좌파 정치인 살바로드 아옌데 대통령의 지지자였다. 그의 부모는 1973년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이후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으나, 1975년 파스칼이 태어난 직후 온가족이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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