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인간애 잃어가는 현대사회, 사랑의 소중한 가치 일깨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립극단 올해 첫 연극 ‘자기 앞의 생’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국립극단의 올해 첫 연극 ‘자기 앞의 생’이 22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한 달 일정으로 개막했다. ‘궁둥이로 벌어먹는’ 창녀들과 그들의 ‘기둥서방’인 포주가 이웃인 프랑스 파리 한 유흥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나가는 유대인 할머니 로자와 아랍계 꼬마 모모(모하메드)의 이야기다.

“인종, 종교, 세대 등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여 인간애를 잃어가는 현대 사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진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과 사랑의 가치를 피워내는 인물들은 각박한 현실을 견뎌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라는 게 극단 측 설명이다.

세계일보

명동예술극장에서 23일까지 공연되는 연극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 파리 유흥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유대인 할머니 로자와 알제리계 무슬림 소년 모모의 이야기다. 국립극단 제공


그래서 연극의 시작도 서구 사회에선 온갖 편견의 대상인 무슬림이 된다는 것과 유대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며 “인종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로자의 가르침으로 시작된다. 젊은 시절 남편 신고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던 정신적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로자는 스스로를 “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평생을 산 유대인 여자”로 정의한다. 젊어선 그녀 역시 창녀였고, 나이가 들면서 호구지책으로 다른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다 마지막으로 남은 모모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동심으로 어깨너머 어른들 세계를 관찰하며 관객에게 나름의 철학을 얘기하는 모모는 “무슬림으로 키워 달라”는 부친 요구대로 독실한 무슬림으로 자랐지만 로자 덕분에 히브리어와 유대교 의식 등에도 능숙하다.

이처럼 인종·종교의 벽 없이 가난하지만 여느 조손(祖孫)가정처럼 단란한 일상을 보여주던 연극은 중반부터 로자가 뇌경화증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고, 갑자기 모모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호흡이 빨라진다. 극의 결말은 병원에 갇힌 채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없다는 로자를 위한 모모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세계일보

로자 역은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며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배우 양희경과 제55회 동아연극상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국립극단 시즌단원 이수미가 더블 캐스팅으로 맡았다. 개막 전날 이뤄진 프레스콜 전막 공연에선 전반부를 이수미가, 후반부를 양희경이 맡았는데 모두 좋은 연기를 펼쳤지만 차이가 확연했다. 이수미는 극 이해를 돕는 안정적인 발성이 장점이었고 양희경은 자연스러운 연기가 돋보였다.

사실상 주인공으로 극 전개를 이끌어가는 모모 역에는 국립극단 청소년극 노란 달, 타조 소년들 등에 출연하며 청소년 캐릭터를 깊이 있게 다뤄온 오정택이 열연했다.

원작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로맹 가리가 평론가의 편견을 깨기 위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해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며 ‘작가 중복 수상은 없다’는 원칙을 깨고 두 번째 공쿠르상을 받는 영예로 이어졌다. 하지만 연극에선 많은 부분이 로자와 모모의 대화로만 압축되다 보니 아쉬움이 남는다. 무슬림 비율이 7.5%에 달한다는 프랑스 내 인종 갈등 속에서 싹튼 로자와 모모의 사랑이 전하는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랑해야 한다”는 감동도 바다를 건너오다보니 겉도는 느낌을 준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