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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ESC] ‘혼술남녀’의 아지트···원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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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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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길다. 날이 좀 풀리려나 싶으면 한파가 오고, 눈까지 내린다. 지겨울 리 없는 술자리이지만, 매번 같은 사람과 술을 마시니 가끔은 간절히 ‘혼술’을 하고 싶어진다. 이럴 때는 늘 마시는 ‘소맥’ 대신 오랫동안 천천히 마실 수 있는 술이 있는 곳을 골라야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술집을 찾아 나서는 여정은 때로 고되지만, 보통은 즐겁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지하철 4호선과 6호선 효창공원앞역에는 이런저런 가게가 드문드문 모여 있다. 며칠 전 ‘예전에는 눈에 띄는 가게도 거의 없던 곳이었는데, 참 많이 변했다’라고 생각하면서 거리를 거닐다 간판도 없는 하얀색의 식당을 발견했다. 도로 앞에 나 있는 넓은 유리창과 ‘오늘의 추천 메뉴’가 적혀 있는 작은 칠판만이 이곳이 식당임을 추측하게 했다.

가게 이름은 ‘원효림’. 혼자 술 마시기 좋은 식당이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직감했다. 주방을 둘러싼 듯 딱 맞게 짜 놓은 바 형태의 테이블은 혼술족의 눈엔 아늑한 거실처럼 보였다. 테이블 폭도 이런저런 음식을 늘어놓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석화, 닭발 편육 같은 소박한 한식, ‘대파 굴 볶음’과 ‘꽈리 오징어 입 볶음’과 같은 중화풍 요리, 트리파(이탈리아 내장요리) 같은 간단한 양식 등, 이곳의 메뉴는 다양했다. 술꾼이 원하는 안주는 모두 갖춘 셈이다. ‘오늘의 추천 메뉴’인 ‘대파 굴 볶음’과 ‘꽈리 오징어 입 볶음’과 ‘오늘의 파스타’를 주문했다. ‘신선한 총알 오징어를 이용해 만들었다’는 ‘오늘의 파스타’는 녹진한 내장과 먹물의 향이 그대로였고, 야들야들한 오징어 살이 일품이었다. 꽈리고추와 오징어 입을 버터에 볶은 ‘꽈리 오징어 입 볶음’은 술 마시면서 하나씩 집어 먹기에 좋은 크기였다. 오징어 입 특유의 오독오독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계속 술을 부른다. 뭉텅뭉텅 썬 대파와 엄지손가락만 한 굴을 센 불에 볶은 ‘대파 굴 볶음’ 역시 주문을 후회하지 않을 메뉴다.

원효림의 또 다른 매력은 주류 목록을 구경하는 것이다. 한라산소주부터 옌타이고량주, 테킬라와 싱글 몰트위스키, 맥주와 와인까지 골고루 갖췄다. ‘주인장은 100% 주당일 거야’라고 되뇌며 맥주에서 화이트와인으로, 레드와인에서 소주로 갈아타며 신나게 마시고 씹어 삼켰다.

사실 혼술을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 혼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그 누구에게든 보이는 게 어쩐지 민망하다. 중독 수준의 술꾼이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 같아 싫기도 하다. 그래도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취하고 싶으면 별수 없다. 혼자 있어도 좋은 ‘원효로의 숲’, 원효림에서라면 혼자 마셔도, 혼자 취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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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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