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죽도록 노력하면 된다고요? [똑똑! 한국사회]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고에서 실시된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에 앞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유지민 | 서울 문정고 3학년



지난 3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개학하던 3월4일부터 이 시점까지 가장 많이 들은 말이라면 단연코 “올 한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라”일 것이다. 주변 어른들이, 학교 선생님이, 인강 강사가, 친구들까지 입 모아 말한다. 고3의 한해는 공부가 무엇보다 우선순위이고, 공부를 위해선 인간관계, 취미, 쉼, 수면, 식사, 모든 걸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실제로 ‘죽을 만큼’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아주 많다. 쓰레기통엔 카페인 음료 캔이 잔뜩 쌓여 있고, 시험이 끝나면 누가 1등급이고, 지난 시험에 비해 등급이 떨어졌는지 부지불식간 소문이 퍼진다. 순전히 공부만 잘해선 안 되고 여러가지 특별 활동과 학생 자치행사에 참여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도 해야 한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간다. 5~6시께 대치동 학원가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대부분의 학원은 기본 서너개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면서 학원에 살다시피 지낸다. 책을 담기에 가방이 모자라 캐리어를 들고 다니기도 한다. 대학교 이동 강의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 속에서, 학생들은 잠깐의 ‘공강 시간’에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학원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나마 낫다. 방학이 되면 많은 친구가 기숙형 관리 독서실, 학원에 입소한다. 이들은 자율성을 잃고 학원에서 정해준 시간표대로 살아간다. 그 학원에 다니는 친구의 일정을 본 적 있다. 그들은 매일 밤 11시부터 30분간 필요한 연락을 취하고 나머지 시간엔 핸드폰을 압수당한다. 학교처럼 중식과 석식도 모두 학원에서 제공한다. 이곳이 독서실인지 감옥인지 헷갈릴 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학원들은 ‘효율적인 공부 환경 조성’을 표방한다. 이곳에 들어와야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청소년을 극한으로 내몰고 있음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아동 청소년 삶의 질 2022’ 보고서를 보면, 국내 0~17살 아동 청소년 자살률은 2021년 기준 10만명당 2.7명에 달했다. 또한 교육부 외 기관 두곳이 진행하는 청소년 건강행태 조사에선 2020년 대한민국 전체 청소년의 10% 이상이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따르면 2022년 일반고 3학년 63.0%, 영재·특목·자사고 3학년 72.4%가 학업이나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공부하다 실제로 생을 마감하는 학생들이 있는 세상에서 ‘죽을 만큼 공부하라’는 용인되어선 안 되는 말이지 않을까. 살아서 매일 학교에 가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제 삶의 몫을 다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입시를 겪으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특히 사교육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더욱 양상이 심해진다. 이 환경을 버텨내는 학생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 또한 존재한다. 고등학교 입학 뒤 지금까지 수학, 영어 과외 이외의 사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내가 그 예시다. 부모님이 충분히 지원해주시고, 학교 근처에 다양한 학원이 있지만 어느 곳도 가지 않았다. 휠체어를 타기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은 갈 수 없고, 등하원이 어려운 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나의 의사가 더 많이 반영된 결정이다. 3년간 장기전을 압박받으며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남들이 학원에 있는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고, 공연을 보고, 여행을 갔다. 오히려 이 시간들이 재충전과 동기 부여가 되어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 삶에서 흔히 통용되는 이치이다. 그러나 모두에겐 저마다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와 가치들이 있다. 어느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지켜내야 한다. 건강, 행복, 쉼,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것은 없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날카로운 잣대보다 너그러운 포용의 태도로 대해주면 어떨까.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