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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 ‘라이딩 인생’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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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라이딩 인생’ 포스터. 지니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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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철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자식의 미래를 열어주고자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부모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며칠 전 마지막 회차가 공개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1951년생 애순과 남편 관식은 딸 금명의 일본 유학 비용 마련을 위해 소중한 추억이 담긴 집을 판다. 이제 한국 부모의 뜨거운 교육열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화한 듯하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라이딩 인생’을 보면, 여섯살 영어 유치원생을 위해 ‘라이더’로 투입되는 조부모와 유아기 사교육에 사활을 건 부모들이 등장한다.



통계는 드라마 속 믿기 힘든 장면들이 허구가 아닐 수 있음을 알려준다. 얼마 전 발표된 통계청·교육부 조사 결과에선, 작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이 29조원을 넘기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번에 처음 나온 영유아 조사 결과는 작년 7~9월 영유아 사교육비가 8천억원에 달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직 통계가 없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재수와 ‘반수’에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2010년 20%를 살짝 넘겼던 재수생 비율은 2024년 35%로 높아졌다.



출생아 수 감소로 학령인구가 줄면 교육 경쟁이 완화되고 사교육비 지출이 감소하리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실현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가지 설명은 자녀에 대한 높아진 기대와 교육 투자 여력이 커진 학부모의 출현이다. 경희대 김태훈 교수(경제학)의 최근 연구는 2009년 이후 사교육비 증가의 상당 부분이 학부모들의 교육·소득 수준이 높아진 데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오히려 사교육과 재수의 유인이 커졌다는 지적도 있다. 수험생 수가 줄면서 성적이 높아질 때 좋은 대학에 합격할 확률이 더 큰 폭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이 늘면서 조기 사교육 시장이 더 커지고, 반수로 돌아선 대학생이 늘어난 현상도 ‘성공 확률’이 높아진 효과로 설명된다.



이러한 요인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교육 경쟁 격화와 사교육비 지출 증가의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노동시장에서의 격차 확대에서 찾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고은미, 이지영 박사가 각각 작성한 서울대 학위논문 두편은 대졸자 내에서도 출신 대학의 순위에 따른 임금 격차가 확대되었으며, 이 격차가 경력이 쌓이면서 더 벌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통계청에 따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 격차가 2017년 약 128만원에서 2023년 약 167만원으로 커졌다. 시험 몇 문제를 더 맞는지에 따라 대학과 전공이 갈리고, 이 사소한 차이가 평생 넘어서기 힘든 ‘계급’으로 고착되는 현실에서, 어떤 부모든 자녀가 2등 혹은 3등 시민으로 낙오되는 일을 막기 위한 교육 경쟁에 내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극심한 교육 경쟁과 사교육의 폐해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충분한 수면도, 건강한 식사도, 어릴 적 추억도 잃어가는 아이들은 물론, 금전적·시간적 부담과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는 학부모들 모두 피해자들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아이를 낳는 결정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전년도 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늘면 합계출산율이 감소한다는 김태훈 교수의 연구 결과는 그래서 놀랍지 않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가 넘쳐나는 치열한 교육 경쟁에서 정작 승자를 찾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힘들게 애쓴 만큼 학생들의 진정한 실력이 개선되고 이에 따라 국가의 생산성과 경쟁력이 높아진다면 좋겠지만, 이 제로섬 게임은 소수의 사람이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는 결말을 남길 뿐이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노력해서 얻은 ‘지위’에 대한 승자의 집착과 보상심리는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가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경제성장이 정체하고 좋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자녀의 앞날에 대한 부모의 걱정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포심에 사로잡힌 부모들 모두가 자기 자녀의 앞길만을 터주기 위해 무한경쟁에 나서면서 결과적으로 자녀 세대 전체가 ‘헬조선’으로 떠밀리고 있는 역설적인 현상은 기이하다. 이 각자도생의 정글에서 벗어날 길은 정말 없을까? 수십조의 사교육비 중 일부라도 모든 청년세대의 고용 여건과 일자리 질 개선에 쓰는 방법은 없을까? 개별 부모끼리의 ‘담합’이 어렵다면,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이 망국적인 경쟁의 사슬을 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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