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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화)

폭싹 속았수다 [육상효의 점프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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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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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육상효 | 영화감독



1972년 2월8일 엄마의 구멍가게는 도매상 대전상회로부터 화장지 10개, 백도 통조림 3개, 미원 100그램짜리 10봉을 총 1170원에 구입했다. 연탄 30장을 600원에 팔았고, 하루 매상은 총 1915원이었다. 6만원의 빚을 내어 시작한 구멍가게의 첫날 수입과 지출을 차감하고 남은 빚은 5만9880원이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날이 대부분이었고, 결국 빚 6만원이 다 소진된 몇달 후 엄마는 구멍가게를 접었다. 넷이나 되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에 아버지의 초등교사 박봉으로 턱없이 모자라 시작한 가게였지만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폐업 후 남은 건 빈 점포와 그 점포에 딸린 방 두 칸, 그리고 금전출납부였다. 종이를 덧대어 두껍게 해서 검은색 종이로 표지를 마감한 공책이었다. 책등은 천으로 단단히 붙이고 금전출납부라고 한글로 적었다. 엄마는 적요, 수입, 지출, 잔액 등의 항목들 아래로 파란색, 빨간색 줄들이 가늘게 그어진 이 공책을 당신의 치부책으로 삼았다. 가난한 살림에 빌린 돈, 갚은 돈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갚은 돈보다 빌린 돈이 많은 숫자들은 언제나 서러웠다. 엄마는 숫자들 사이사이에 자신의 감정들도 기록하기 시작했다. 금전출납부는 서서히 엄마의 감정출납부가 되었다.



엄마라는 자그만 구멍가게의 수입은 자식들의 일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1980년 1월25일, 11시는 수입의 절정이었다. “내 생애 이다지도 큰 기쁨이 또 있으리오. 나는 생질 조카로부터 전화로 상균이 됐어요 하는 소리와 함께 아찔함과 함께 어디론지 훨훨 날았으면 좋을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큰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 소식을 들었던 날이다. 2년 뒤에는 둘째인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공무원 무이자 학자금 융자 70만원을 받아서 두 아이의 학비를 댔다고 공책에는 쓰였다. 1984년 2월25일에는 “큰아이가 대학을 졸업해서 인생의 삶의 보람을 찾은 것 갔다”고 쓰셨고, 같은 해 5월27일에는 하나뿐인 딸을 결혼시키고 “나는 또 한번 허무함과 섭섭함에 엉킨 마음을 어찌 수습할 길이 없어서 며칠을 바보처럼 우두머니처럼 지냈다”고 기록하셨다.



자식들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의 마음들은 감정의 지출로 기록됐다. “2002년 4월19일 둘째의 영화 개봉이 실패로 끝나서 한마디로 너무 가슴이 아프다. 돈도 돈이지만 그 힘드려 만든 작품이 가치가 없게 되니 너무 딱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쓰셨다. 장남의 사업이 안 좋아지면서도 엄마의 감정은 슬프게 지출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지출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1976년 12월30일 18살에 낳은 20살 아들을 군대에서 사고로 잃었다. “꿈만 같은 그날 이후 세상 아무것도 알고 싶은 것이 없다. 허무한 세상 조금 머물다 따라가 만나리라”라고 쓰셨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금명이가 대학 합격증을 가지고 집에 왔을 때 울던 애순을 보면서, 우리의 대학 입학에 울던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 ‘살면 살아진다’는 말은 살아갈 수 없는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애순의 엄마도 나의 엄마도 이 말을 했다. 살아낸 시간 후에 오는 기쁨은 서러움이기도 했다. 1978년 12월14일에는 엄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에게는 또다시 슬픔은 닥아왔다. 그다지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던 우리 어머님을 여의고 또다시 괴로운 마음”이라 그날의 마음을 적었다. 아들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같이 견디며 바라본 어머니였다. 그리고 2020년 10월9일 새벽 “남들은 93세 호상이라지만 나는 하늘이 문어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처럼 충격이었다. 하지만 한편 차례걸음이라 하니 마음을 달래본다. 이제 자식들을 믿고 살아야지”라고 적었다. 그러나 50년 넘게 출납부를 채우던 기록은 그날 이후로 중단되었다. 60여년을 같이 산 남편의 죽음 이후의 삶은 기록할 의미가 없어졌기도 하고, 엄마의 몸과 마음의 건강도 그 이후 부쩍 쇠약해지셨다. 공책의 맨 마지막 장에만 날짜도 없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그 자식을 안 낳았으면, 오늘날의 이 아픔은 없었을 것을, 해점은 청평 땅에서 떠나가는 영결차를, 바라보진 않았으리, 까마귀도 내 마음같이 목메여 운다.”



초등학교만 나오신 엄마가 쓸 수 있는 최선의 시는 유행가의 가사를 고치는 것이었다. 삶의 마지막 혼미한 마음속에서도 엄마의 남은 마음, 그 감정출납부의 마지막 잔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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