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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 (월)

[36.5˚C] 공포정치와 눈치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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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으로 24일 직무에 복귀한 한덕수(오른쪽)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해 국무위원들과 오찬 간담회를 시작하기 전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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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문을 꼼꼼히 읽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정무적 고려는 당치 않습니다."

헌법재판소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 신분으로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은 국회의 헌재 구성권 침해'라고 선고한 날, 즉각 대응하지 않는 사정을 두고 최 부총리 측이 기자에게 답한 내용이다. "헌재 결정을 존중하겠다"던 최 부총리는 25일간 결정문을 읽다, 탄핵 기각으로 돌아온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권한대행과 헌법적 의무를 넘겼다.

헌재 결정과 함께 작위의무가 생기고, 이행하지 않으면 헌재법 66조 위반이란 걸 서울대 법대 수석졸업자인 최 부총리가 모를 리 없다. "여야 합의를 확인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결정 후 발생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이유는 국민 앞에 명확히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헌재 결정을 무시한 사유를 정무적 판단 외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최 부총리 본인도 더불어민주당 주도 탄핵소추안으로 정치적 위험에서 자유롭진 않게 됐다. 허나 그는 현재 권한대행이 아니다. 헌재도 "전례가 없는 일로, 심판의 실익부터 살펴야 한다"며 신중한 상황. 결과에 따라 '눈치게임' 성공 여부가 갈릴 것이다. 이젠 바통을 넘겨받은 한 총리 차례다. 민주당은 "임명하지 않으면 파면"이라며 재탄핵을 시사하고 나섰다.

국정에 온힘을 쏟아도 부족할 공복들이 눈치게임을 벌이게 된 건 탄핵의 일상화 영향이 크다. 현 정부 들어 발의만 30번, 9전9패 성적표를 받아들고도 170석 거대 야당은 변함이 없다. 헌법·법률 수호를 위한 최후의 절차 탄핵이 정치적 수단으로 남발되면서 혼란이 커졌다.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프랑스 대혁명 때 공포정치도 본디 혁명 정신을 지키려는 목적에서, 반대파 제거 수단으로 남용돼 사회를 혼돈에 빠뜨렸단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다.

헌법적 수단이 오히려 법치를 뒤흔드는 양태다. 숱한 탄핵에 따라 임시로 맡은 권한대행에게 책임 회피가 쉬운 길인 건 자명하다. 일상이 된 탄핵이 정치적 무책임성을 키우고, 엄중한 대내외 경제 대응을 실기하게 한다. 거친 탄핵과, 불안한 국정과, 그걸 지켜보는 국제사회. 3대 경제지표는 실시간 고꾸라지고, 미국의 민감국가 지정 여부 파악도 늦을 만큼 위기 대응력은 약화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에 기업이 투자할 리 만무하다.

탄핵정치가 부른 눈치게임, 승자와 패자를 떠나 피해자는 분명하다. 국정 마비, 경기 악화에 신음하는 국민이다. 한 총리의 복귀 일성 "초당적 협조"는 소통과 설득 없인 불가하고, 매듭짓지 않으면 위든 앞이든 나아갈 수 없다. 더는 법치와 민생을 희생하는 무책임한 정치가 용인돼선 안 된다.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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