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끈 불이 강풍에 되살아나”
주민 1400명 대피, 주택 등 77채 불타
지리산 천왕봉 번질라... 방어 총력
24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에서 산불이 주택을 덮치고 있다. 산과 나무를 시커멓게 태운 불길이 용암처럼 번지고 있다. 검은 연기도 치솟고 있다. 이날 오후 강풍이 불면서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은 안동까지 번졌다. 안동시와 의성군은 주민 대피령을 내렸다./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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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산불 진압 현장에선 오후 들어 갑자기 초속 25m 안팎의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 불길은 방향을 바꿔 북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진화 작업을 하던 대원들이 술렁였다. 의성 바로 북쪽엔 15만명이 사는 도시 안동이 있기 때문. 경북도청도 안동에 있다.
“안동 시내로 불이 넘어가는 것만은 무조건 막아야 해요.”
산불 진압 헬기 조종사 이동규(43)씨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헬기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이날 오전 6시부터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물을 뿌리고 있다. 산불 현장에 600번 이상 뛰어든 베테랑이지만 “이번처럼 바람이 속을 썩이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날 대원들은 불과 사투를 벌였다. 헬기 60대, 진화 대원 2728명, 소방차 등 425대가 ‘방어선’을 치고 번지는 산불을 붙잡았다.
안동시는 길안면·남해면 등 주민 1100여 명을 길안중학교·안동체육관 등으로 긴급 대피시켰다. 길안면 주민 전은영(46)씨는 “급하게 대피하는데 동네에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며 “전쟁이 나서 피란 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강풍에 살아난 ‘좀비 산불’… 휴게소·지휘본부도 덮쳤다
의성군도 이날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빨리 대피하라’는 재난 문자를 19번 보냈다. 의성군 주민 900여 명은 의성체육관 등으로 긴급 대피했다.
안동과 맞닿아 있는 의성군 점곡면은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 마스크를 쓰지 않고선 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늘은 대낮인데도 노을이 진 것처럼 불그스름했다.
주민 신모(83)씨는 집 주위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산불로 하나밖에 없는 집까지 태울 순 없지 않으냐”며 “뭐라도 해보려고 호스를 끌고 나왔다”고 했다.
의성과 안동 사이에 있는 서산영덕고속도로 점곡 간이휴게소 건물에 불이 붙기도 했다. 한국도로공사는 오후 3시 35분쯤 북의성나들목에서 영덕요금소까지 양방향 통행을 전면 차단했다. 의성 일대의 주요 도로도 대부분 통제됐다.
의성에서 시작된 불이 안동까지 번지자 청송군도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의성에는 지난 22일부터 사흘째 산불이 타고 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불탄 산이 8490ha에 달했다. 올해 발생한 산불 중 최대 규모다. 축구장 1만1890개 넓이와 비슷하다. 역대 산불 중에선 셋째로 피해 규모가 크다. 산불의 길이는 164㎞에 달한다. 이날까지 주택 등 77채가 불탔다.
그래픽=박상훈 |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향한 산청 산불
산림청 관계자는 “초속 16m 안팎의 강한 바람 때문에 애써 끈 불이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지난 22일 산불 현장에서 진화 대원 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예측하기 어려운 ‘도깨비 바람’이 문제였다.
오후 들어 불길이 지리산 국립공원을 향했다.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 6km까지 근접했다. 국립공원 경계를 기준으로 하면 600m 거리까지 불이 번졌다. 지리산 자락의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주민들은 “불이 지리산 쪽으로 밀려오고 있는 게 내려다보인다”고 했다. 경남도는 “지리산 천왕봉은 우리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며 “방어선을 치고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이날 산청에선 산불 현장으로 급히 달려가던 산불 진화차가 전복돼 산청소방서 소속 소방관 2명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산청 현장에선 지난 21일 이후 4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의성·울주·하동도 특별재난지역 선포
정부는 지난 22일 경남 산청에 이어 경북 의성과 울산 울주, 경남 하동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산불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해 기업도 나섰다. CJ제일제당은 산청·의성 등에 햇반 등 1만여 개를 지원한다. SPC그룹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빵 5000개와 생수 2000개 등을 전달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긴급 지원 성금 3억원을 전달하고, 의성 지역에 6000여 명이 식사할 수 있는 ‘밥차’를 투입했다. 교촌치킨을 운영하는 교촌에프앤비는 치킨교환권 등 1억원을 기부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국내 4대 금융그룹은 총 4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BNK금융그룹은 3억원을 기부했다.
KB국민카드·신한카드·하나카드·우리카드·삼성카드·롯데카드 등 카드사들은 피해 고객의 카드 결제 대금을 최대 6개월간 유예해준다.
[의성=노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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