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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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사회학자 최재석이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출간한 것은 1965년으로 올해가 60년 되는 해다. ‘한국인론’에 관한 선구적 저서인 이 책을 볼 때 마다 공동체의 성격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최재석은 집단으로서 한국인 고유 특성을 다섯 범주로 정의했는데 그중 다섯번째가 ‘공동체로부터의 개인의 미분화’다. 최재석 이후 수많은 학자가 이 주제를 다뤄온 결과 일반인들에도 웬만큼 익숙한 담론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은 고래로 집단에 묻어 가려는 경향이 강하며, 개인은 어려서부터 ‘모난 돌’이 되지 않는 훈련을 받고 자란다. 대세를 추종하며, 따로 놀지 않는 처세를 중시하는 이런 문화를 최재석은 ‘호박주의(Pumpkinism)’로 명명했다. 호박처럼 둥글둥글 살기를 권장한다는 뜻이다.
그 결과 한국인 사회에선 서구적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발현되기 힘들다고 최재석은 봤다. 남에게 비친 자기 모습이 행동 기준이 되고, 남의 행동에 유달리 큰 관심을 두며,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의 인생에 간섭한다. 단독으로 신과 대면하는 개인이 아니라 온갖 네트워크상에서 타자에 의해 위치 지어진 개인만이 존재한다. 그 위치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분위기를 깬다는 비난이 돌아온다.
지난 21일 복학 신청을 마감한 연세대 의대에서 재적생 절반 이상이 복귀했다고 한다. 속속 마감이 도래하는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행한 일이지만 개운치는 않다. 지난 두 학기를 꼬박 젖히고 이번에도 등록하지 않은 학생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당국과 학교는 제적을 벼르고 있다. 나중에 못 이기는 척 구제해줄지 어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제적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럼에도 등록하지 않은 강심장은 대단하다. 학생도 학생이지만 부모가 놀랍다. 인생 최고 황금기를 2년째 허송세월하는 자식을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나는 그 나이에 책을 읽지 않은 것을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후회한다). 자녀가 의대에 들어가면 절로 그렇게 되는 건가.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공동체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와 대세를 놓치지 않는 민첩함이 없다면 인생이 고달프다. 내가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가 의대생이 된다면 휴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스무살 때 공부가 평생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것보다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대학생 때는 그렇지 못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는 국가나 사회 같은 큰 차원의 집단윤리가 빈약한 것이 특성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개인이 있어야 한다. 개인이 집단에 묻히는 사회에선 집단이기주의, 즉 소집단들의 에고가 곳곳에 넘쳐나고 규율되지 않으며 때때로 충돌한다. 소집단에 속한 개인들은 철저히 무책임하고 비성찰적이므로 문제가 조화롭게 해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멀쩡한 인간들이 집단에만 속하면 막가파가 된다.
어린 의대생 욕할 필요 없다. 그렇게 가르친 건 기성세대다. 그렇게 어리지도 않은 박단 전공의 비대위원장은 일종의 비호감 캐릭터로 미운 말투와 미운 표정을 공격받는다. 한국에서 소집단을 대표하려면 매력적인 성격으로는 곤란하다. 집단을 위해 최고 막가파가 되어야 한다.
최근 서울대 의대 교수 4명이 전공의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후에 박단씨로부터 “교수 자격이 없는 분들”로 공격당했다. 집단 안에서는 절대복종의 상하관계, 그 집단의 이익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안면몰수하고 삿대질한다. 아 면면한 DNA여. 어느 집단에도, 어느 시대에도 박단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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