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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받치는 건 여성…무슨 일이 있어도 유머 만은 놓치지 마세요” [이설의 글로벌 책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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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하다 보면 슬그머니 싹트는 궁금증. ‘글쓴이는 어떤 사람일까.’ 번역 외서(外書)가 쏟아지는 시대지만 해외 저자는 만남의 문턱이 높죠. 한국 독자와 해외 작가 간 소통을 주선합니다.

‘튀튀를 입은 소녀’. ⓒMaira K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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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건 좋은데 감상은 익숙치 않다. 작품이 던진 알쏭달쏭한 마음의 파문에 누가 알맞은 언어를 붙여주면 좋겠다 싶다. 그림이나 사진을 담은 아트북도 마찬가지다. 시선이 가는 작품을 만나면 담백하고 정곡을 찌르는 해설 한 줄이 특히 아쉽다. 미국 예술가 마이라 칼만의 첫 국내 출간작인 ‘우리가 가진 것들’(윌북아트)을 읽고선 이런 갈증이 알맞게 해소되는 쾌를 느꼈다.

세상에 들 것들이 이렇게 많았나. 노란색 표지의 책에는 각양각색의 여성 80여 명이 등장한다. 풍선, 개, 화분, 양배추, 가위, 책, 딸…. 그들의 손에는 꼭 무언가 들려 있다. 물건뿐 아니라 희망, 질투, 아픔, 책임감, 사랑 같은 것들도 이고 있다.

여자들은 무얼 가지고 있나?

집과 가족.
그리고 아이들과 음식.
친구 관계.
일.
세상의 일.
그리고 인간다워지는 일
기억들.
근심거리들과
슬픔들과
환희.
그리고 사랑.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그림을 곁눈질하며 시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글귀를 따라가다보면 마침내 마법에 걸리게 된다. 잿빛 현실에 햇살을 비추는 작가의 마지막 당부 “꼭 버티세요(holding on).” 마이라 칼만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묘한 그림과 더 묘한 그림이 만난 이 책의 원제는 ‘Woman Holding Things’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작가, 삽화 에세이스트, 그림책 작가, 디자이너…. 75세 칼만은 미국의 전방위 예술가다. 2008년 앤디 워홀 등이 이름을 올린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17년에는 당대 가장 뛰어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미국 그래픽아트협회(AIGA) 메달을 받았다. 노년에 접어든 이후 무섭게 활동 반경을 넓히며 한국에도 이름을 알린 그를 e메일로 만났다.

‘인형과 책을 든 소녀’. ⓒMaira K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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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남자)가 말했다.
내 어휘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동의할 수 있을 듯하다.

어머니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땐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이번 책의 주제는 ‘붙잡음(holding)’입니다. 어떻게 주제를 정하셨나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붙잡고, 또 붙잡아야 하는 균형 잡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붙잡고,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붙잡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두고, 책과 아이를 안고, 아픈 이에게 수프 한 그릇을 건네기도 하죠.”

―지금까지 안고 온 것들과 앞으로 붙잡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유머 감각을 붙들어 왔어요. 가족과 일에 대한 사랑도요. 친구들, 산책, 여행, 음악, 책, 꿈 역시 마찬가지죠. 앞으로도 이런 것들은 놓지 않도록 노력할 겁니다.”

―책에서 남성들은 “그들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짧게 등장하는 게 전부죠.
“저는 여성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여성들은 세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요. 제 삶 곳곳에서 여성 친척들의 영향이 깊게 새겨져 있죠.”

―책에는 평범한 여성들과 함께 거트루드 스타인, 이디스 시트웰, 잉글랜드의 마틸다 여왕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이들을 선택한 기준이 있나요.
“우연과 직관을 따릅니다. 어떤 이미지나 인물과 사랑에 빠지면, 그들은 자연히 제 책에 등장하게 되죠. 호기심과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정원에서 꿀을 들고 있는 키키 스미스’. ⓒMaira K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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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별히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그럴 땐 수많은 사람을
내가 다 먹여 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온 세상을 품에 안을 수 있을 것만 같고.

하지만 어떨 땐, 작은 방조차 겨우 가로지른다.
나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다. 얼어버린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마이라 칼만은 하나의 장르’라는 평가가 있죠.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아마도 제가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지 않았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어요. 저는 규칙이나 정해진 기준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만의 관점을 설명하는 요소일지도 모르겠네요.”

―TED 강연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은 구원과 같다”고 하셨죠.
“작업을 미루다가도 결국 작업실에 가서 앉아 그림을 그리는 순간 진정한 기쁨을 느껴요. 색을 섞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그림을 그릴 때, 좋은 그림이나 글을 완성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 기쁨에 견줄 만한 건 아기를 안아주는 순간 정도일까요.”

―글쓰기에 좌절감을 느껴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고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뇌의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언어와 단어를 다루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와 감각적인 인상을 담당하죠.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정말 큰 행운입니다. 창작에서 가장 큰 도전은 지루하지 않은 작업을 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됐나요.
“아직도 자신감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언젠가 자신감이 제게 다가올 지도 모르죠. 그동안 저는 그저 계속해서 작업하고 탐구할 뿐입니다.”

왼쪽은 작가의 시어머니와 그의 쌍둥이 자매를 그린 ‘시샘하는 마음을 품은 여자들’ . 오른쪽은 ‘커다란 양배추를 든 짜증이 난 여자’. ⓒMaira K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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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늘 땀에 젖어 계셨고
항상 궁지에 몰린 것 같았다.
아마도 자기가 사랑한 남자와
결혼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창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진실성과 유머와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요. 느낀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주제로 책을 내셨죠. 주제는 보통 어떻게 정하나요.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걷고 바라보고 들으면서 보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뜻밖의 주제가 저에게 다가와요. 그리고 그 주제가 계속 제 마음에 머문다면,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고민할 만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죠”

―색을 사용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색은 저에게 감정과 직결되는 요소예요. 색을 보면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바탕으로 색을 선택하죠. 색의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감각적으로 만족스러워야 합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최종적인 방향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나요.
“전혀요! 저는 오히려 그 감각을 사랑해요. 열린 가능성, 자유로움. 주제가 정해지면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마이라 칼만이 그린 2001년 12월 10일자 ‘뉴요커’ 표지. 출처 마이라 칼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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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것을 가졌다가 기진맥진하고
낙담할 수 있다. 그리고 감정이 차오를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누구든 어떤 날에든 그럴 수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고 나면 다음 순간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창작으로 풀어내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항상 제 감정을 솔직하게 바라보려 합니다. 기쁨, 슬픔, 유머, 상실 등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저의 방식이죠. 독자와 공명하려면 정직한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모든 것과 다름없는 기억도 중요한 요소예요. 기억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정의할 수 있고,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꿈꿀 수 있으니까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극복 방법은 무엇인가요?
“작업을 미루고 딴짓을 해요. 책장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가서 스케치를 하거나 TV에서 추리물을 보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결국 다시 작업할 마음을 갖추게 되죠. 마감이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면 (조금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아니죠.”

―‘뉴요커’의 표지 그림을 15차례 그렸고, 2년 간 삽화 칼럼을 연재하면서 ‘뉴욕이 사랑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죠. 당신에게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제 자신을 기자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넘쳐나죠. 인간의 삶은 끝없이 매력적이니까요. 세상을 관찰하고 전하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책에 담긴 일상 속 다양한 순간들이 눈길을 끕니다.
“저는 삶 속에서 작은 기적들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것이 흥미롭고, 세상은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범한 순간도 깊이 들여다보면 특별한 이야기를 품고 있죠.”

‘딸을 안고 달래며 위로하는 여자’가 실린 페이지를 마이라 칼만이 펼쳐보이고 있다. 출처 마이라 칼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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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간을 찾자마자 더 많은 시간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사이에 더 많은 시간을
충분한 시간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너무나 이상하다.
우리는 살아간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죽는다.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다.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최근 ‘후회(remorse)’를 주제로 그림 에세이를 출간했습니다. 주제가 눈길을 끄는데요.
“나이가 들면서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 더 친절할 수 있었던 순간들에 대해 고민했죠. 그러던 중 ‘후회’라는 단어가 머리와 마음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모두가 크고 작은 후회의 순간을 안고 살아가더군요. 후회는 피할 수 없으며, 때로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주변 사람들을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제 다음 프로젝트의 주제는 ‘기쁨(JOY)’입니다. 후회를 다룬 후에는 당연히 기쁨을 이야기해야겠죠. 하지만 기쁨을 글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복잡한 감정이니까요. 그래도 계속 탐구하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려 합니다.”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나 매체가 있나요.
“저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회화, 글쓰기, 자수, 영화, 음악, 연극과 무용과의 협업까지—이 모든 것이 저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앞으로 또 어떤 기회가 찾아올지 지켜보려 합니다.

―70대에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나이듦’에 대한 철학이 궁금합니다.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이 젊음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스스로는 젊다고 상상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인생은 짧습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색하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에요. 이 느낌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창작은 저에게 삶 자체입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의 제가 아닐 겁니다. 창작을 통해 저는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가죠. 언젠가 한국을 방문해 놀라운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 돌아가고 싶어요.”

‘커다란 책을 안고 있는 이디스 시트웰’. ⓒMaira Kal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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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인 마이라 칼만. 국내에서 첫 출간된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은 2022년 뉴욕타임스 ‘최고의 아트북’으로 선정됐다. ⓒ KIMISA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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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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