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3 (일)

"삼키지 않아도 녹는 약, 주사 대신 미세바늘"... 약 형태 변경에 제약사들 사활, 왜 [테크 인사이트]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제형변경 난도 신약개발만큼 높지만
시장 확대, 수익성 극대화에 기술 개발
환자 투약 편해져 치료 효과 향상 가능
방출 속도 조절, 쓴맛 차단 여부가 관건

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연고와 좌약이 대부분이던 국내 치질약 시장에서 동국제약이 내놓은 경구용 치료제 ‘치센’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치질은 변비나 비만, 과음 등으로 항문 주변 정맥에 피가 몰려 생기는 질환이어서, 해당 부위에 원활한 혈액순환을 유도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그간 ‘치질 부위에 약을 바르거나 넣어야 하는’ 생경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먹어서 치료하는 약이 나와 이를 단숨에 해결해준 것이다. 치센은 현재 국내 치질약 시장 점유율 1위다.

# 미국 제약회사 래디어스헬스는 골다공증 치료제 ‘타이모로신’을 팔이나 엉덩이에 놓는 피하주사에서 경구용이나 몸에 파스처럼 붙이는 마이크로 니들(미세바늘) 패치로 변경하려 했다. 바늘로 몸을 찌르는 통증이 없어 환자들의 투약 편의성이 크게 개선될 걸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상시험 결과 패치형 약물이 피하주사와 비교해 인체에 절반밖에 흡수되지 않았고, 약물이 신체에 흡수되는 농도도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약의 기존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투약 편의성을 높이는 제형 변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주사제를 먹는 약으로 바꾸거나, 알갱이가 큰 알약을 목 넘김이 쉬운 물약으로 바꾸는 식이다. 약효의 큰 개선 없이 약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시장을 확대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에 제형 변화는 매력적인 선택지다.

특히 약 형태를 바꿔 투약이 더 편해지면 병의 치료 효과를 좌우하는 환자 복약 순응도와 직결된다. 복약 순응도는 의료진의 처방대로 환자가 정확한 시간에 정해진 용량을 얼마나 잘 복용하느냐를 말한다. 예를 들어 고혈압 약을 불규칙하게 복용하면 혈압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아 뇌졸중 위험이 높아진다. 업계 관계자는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환자의 삶의 질과 치료 환경이 중시되는 변화에 맞춰 다양한 제형 개발에 나서는 중”이라며 “제형 변화는 신약 개발만큼 난도가 높은 기술”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연고나 좌약이 대부분이던 치질 치료제 시장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경구용 치질 약. 동국제약 제공


그래픽=김대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항암제 투여하는 최적의 방법은


현재 제형 변형 기술이 가장 주목받는 곳은 암과 자가면역질환 치료에 쓰이는 바이오의약품 분야다. 그간 바이오의약품은 약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하는 정맥주사 형태가 많았다. 바이오의약품은 구성 물질의 상당 부분이 단백질이라 위장의 소화효소나 산성 환경에서 쉽게 분해돼 효력을 상실하기에 알약 같은 구강제로 복용할 수가 없다. 더욱이 단백질 의약품은 △분자 크기가 크고 △용해성(용매에 잘 녹는 기준)이 낮아 잘 녹지 않는 데다 △인체 조직 투과력까지 낮아 피부 아래 조직에선 흡수가 잘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약물이 혈류로 흘러 들어가 100% 흡수되는 정맥주사가 바이오의약품을 투약하는 최적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정맥주사는 치료엔 편하지만 의료진의 관리·감독이 필요하고, 맞는 데 시간이 걸려 환자에겐 불편한 제형이다. 가령 평균 일주일 주기로 약물을 투여하는 항암치료를 받는 암 환자의 경우 정맥주사를 맞기 위해 번번이 병원에 가야 한다. 2~4시간이나 걸리는 투약 시간을 견디는 게 더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환자도 많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이 휩쓸었을 때 암 환자 입장에선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많은 항암 치료가 피하주사 방식으로 바뀔 경우, 투약 시간이 5분 정도면 충분한 데다 굳이 내원할 필요 없이 집에서 스스로 주사를 놓으면 되니 환자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될 거란 기대가 나온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피부에 놓는 주사 어떻게 만들까


때문에 업계에선 바이오의약품 제형을 정맥주사 대신 팔이나 엉덩이 같은 피부에 놓는 피하주사로 변경하는 추세다. 스위스 제약기업 로슈가 면역항암제 ‘티쎈트릭’을, 미국 제약기업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가 면역항암제 '옵디보'를 각각 지난해 피하주사 제형으로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미국 제약회사 머크(MSD)는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를 정맥주사에서 피하주사로 변경하는 임상시험 3상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선 셀트리온이 자가면역질환 치료용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를 정맥주사에서 피하주사 제형으로 바꾼 ‘램시마SC’를 개발,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램시마의 오리지널 약 ‘레미케이드’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정맥주사를 피하주사로 변경하는 기술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게 '히알루로니다아제'라는 효소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피부 조직은 겉에서부터 각질층과 표피층, 진피층, 피하지방층의 순으로 구성돼 있다. 피하주사는 피하지방층으로 약물을 넣어 혈관으로 흡수시켜야 하는데, 진피층에 있는 히알루론산이 이를 방해한다. 히알루로니다아제는 히알루론산을 분해해 피하지방층에 공간을 만들어 약물이 혈류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예전엔 동물 고환에서 추출한 히알루로니다아제가 쓰였지만, 부작용 우려에 유전자재조합 기술로 인체의 히알루로니다아제와 동일한 물질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의 주사형 비만 치료제 ‘위고비’. 노보 노디스크제약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암 환자도 약 '붙이고' 일상생활


요즘 업계에선 '마이크로 니들' 패치도 차세대 제형으로 떠올랐다. 머리카락 굵기(0.04~0.08㎜)의 3분의 1에 불과한 미세 바늘을 이용해 피부의 장벽인 각질층을 뚫고 약물을 넣는(경피 전달) 방식으로, 경구용이나 주사 형태를 대체할 제형으로 꼽힌다. 피부에 파스처럼 붙이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약물 주입이 가능해 환자의 복약 편의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향후 항암제에까지 이 제형이 도입된다면, 암 환자들이 약을 '붙인' 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마이크로 니들 적용 시도가 가장 활발한 영역은 비만 치료제다. 초창기 비만 치료제는 주사 형태로 개발됐다. 문제는 효과를 보려면 짧은 주기로 지속적인 투여가 필요한데, 주사는 아픈 데다 감염 위험도 있어 환자들의 심리적·육체적 부담이 컸다는 점이다. 하지만 마이크로 니들은 피부의 표피층(깊이 0.1~0.2㎜)까지만 침투하기 때문에 통증과 출혈이 없다.

대웅제약이 개발하고 있는 마이크로 니들 패치. 대웅제약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마이크로 니들에 묻어 있는 약 성분이 천천히 녹으면서 일정 시간 동안 약물이 방출되도록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약물은 너무 빠르게 흡수되면 부작용이 발생하고, 너무 느리게 흡수되면 효과가 약해진다. 마이크로 니들은 약물 방출 속도를 조절, 최적의 효과를 내는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킨다. 특히 약물의 종류와 농도, 마이크로 니들의 재료와 설계 방식에 따라 방출 속도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어 환자 상태나 치료 목적에 맞게 적용이 가능하고 약물 안정성도 매우 높다는 평가다.

현재 대원제약과 대웅제약, 동아ST 등 국내 제약사들에선 마이크로 니들 패치 제형의 비만 치료제 개발이 한창이다. 이를테면 대원제약과 국내 바이오기업 라파스는 함께 덴마크 제약사 노보 노디스크의 주사형 비만 치료제 ‘위고비’를 마이크로 니들 제형으로 바꾸고 있다. 대원제약 관계자는 “지난해 진행한 임상 1상에서 내약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며 “임상 2상 시기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HK이노엔의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 구강붕해정. HK이노엔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화기관 안 거치고 바로 흡수


물 없이 입안에서 빠르게 녹아 흡수되는 ‘구강붕해제’도 복약 순응도를 높이는 제형이다. 구강붕해제는 약물이 소화기관을 거치지 않고 입 천장 점막을 통해 혈류로 직접 흡수된다. 약을 입으로 먹었을 땐 위와 장, 간을 거치는 동안 소화되기 때문에 몸에 흡수되기 전 이미 약효가 떨어지는데(초회 통과 효과), 구강붕해제는 입을 통해 투여하면서도 이를 피할 수 있다. 약을 삼키지 않아도 되니 영·유아나 노인 환자들의 복약 순응도도 높일 수 있다.

해열진통제와 수면제, 소화제, 알레르기 치료제 등 의약품 전반에 걸쳐 먹는 약을 구강붕해제로 변경한 제품들이 국내에 속속 나왔다. 30호 국산 신약인 HK이노엔의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은 기존 삼키는 알약 외에 구강붕해 알약도 출시해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는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녹는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제형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게 핵심 기술”이라며 “약은 일반적으로 쓴맛이 강한데, 구강붕해제는 직접 혀에 닿기 때문에 쓴맛을 차단하기 위한 보정 기술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김현우 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