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
보는 것은 인식과 통한다. 영어에서 ‘I see’란 말은 ‘내가 본다’는 말과 더불어 ‘알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술은 철학과 가깝다. ‘본다는 것’을 철학과 연결시켜 최초로 다룬 텍스트로는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들 수 있다. 이는 그의 저서 『국가(The Republic)』 제7권에 등장하는 철학적 알레고리로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의 시각과 인식, 그리고 계몽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
민주주의 시민의 분별력으로
참된 지도자의 진언을 경청해
현상에 숨겨진 진리 드러내야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에 따르면, 우리는 어두운 동굴에 감금되어 있는 죄수들이다. 이들(우리)은 어린 시절부터 쇠사슬에 묶여 오직 동굴벽만 바라볼 수 있는데, 뒤쪽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그 앞의 길 위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 사물을 들고 다닌다. 이 사물들은 불빛에 의해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죄수들(우리)은 오직 동굴벽에 일렁이는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기에 이 그림자를 현실의 전부로 인식한다.(사진)
이 우화에서 죄인들이 마주하는 동굴벽은 감각적 현상계를, 햇빛 쏟아지는 바깥세계는 근본적 진리의 영역을 상징한다. 그림자는 현상이고 태양은 이데아다. 동굴 밖으로 나와 눈부신 태양을 마주한 죄수는, ‘국가’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공동체의 지도자를 표상한다. 더불어 이 지도자는 현상 너머의 본질까지 꿰뚫어 인식하는 철학자로서, 이른바 ‘철인(哲人)왕’인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은 동굴의 우화를 통해 감각적 세계(현상계)를 부정하고 이성적 사유를 통해 참다운 이데아(진리)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볼뿐 아니라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뜻. 우리가 진정하게 ‘봄’으로써 사물을 빛으로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주체인 ‘세계관람자(World Spectator)’는 동굴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서도 존재의 근본을 알아보는 시각적 역량을 지닌다. 그런데 실버만이 제시한 ‘바라보기를 통한 세계 인식’을 위해서는 긴 시간과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먼저 동굴 속 현상계를 벗어나 진정한 리얼리티를 직시하고 되돌아와 공동체에 미래의 비전을 깨우쳐 줘야 한다. 그래서 역사는 플라톤 시대뿐 아니라 언제나 국가공동체를 이끄는 용감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그런 계몽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동굴 밖의 진리로 공동체를 일깨우려는 지도자의 말을 제대로 경청할 수 있는 동굴 속 대중의 분별력이다. 현상의 외양만 보는 대중을 빛으로 계몽하는 그를 핍박할 것인지, 아니면 믿기지 않는 진실을 폭로하는 그를 환대할지는 공동체 구성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지적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즈음이다. 자유민주주의란 동굴 속의 사람들이 그러한 분별력을 갖췄다고 보는 것이고, 전체주의란 여전히 대중을 무지몽매하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주어진 것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라 하더라도, 리얼리티를 간파한 지도자의 진언을 믿고 외양에 은폐된 존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성숙한 시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제대로 ‘바라봄’으로써만 어둠에 덮인 현상 세계가 빛으로 드러나며, 칠흑 같은 동굴 속에서도 비로소 햇빛 찬란한 이데아의 세계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자의 외양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거짓은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그래서 피상적 외양 아래 은폐된 참된 존재를 빛으로 드러내는 세계관람자의 눈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