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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2 (토)

“내가 1시간 자면 30명이 죽는다”…1만 명 살린 숭고한 위조범[북적book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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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카민스키 실화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

30년간 유대인·알제리인 등 구한 숨은 영웅

2009년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 원본 출간 당시 아돌포 카민스키.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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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1시간 안에 위조 신분증 30개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1시간 잠들면 아이들 30명이 목숨을 잃는다.”

1944년 프랑스 생페르 거리의 좁은 다락방. 19살의 아돌포 카민스키는 잠을 떨쳐내려고 자신의 뺨을 때리며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있었다. 300명의 유대인 어린이가 국경을 건널 수 있도록 사흘 안에 900장이 넘는 출생신고서, 세례 증명서, 식량 배급 카드와 아이들을 데려갈 어른들의 신분증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하루에 30~50개를 만들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이들의 목숨이 달린 일은 그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작업을 하던 그는 갑자기 눈앞이 까매지며 바닥에 쓰러졌지만, 의식을 찾자 다시 작업을 이어 갔다. 결국 완성한 신분증으로 유대인 어린이들은 나치를 피해 탈출할 수 있었다.

사라 카민스키가 쓴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는 아버지 카민스키의 일생을 생생히 그려 낸 책이다.

카민스키는 1925년 아르헨티나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는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유대인 사회주의 조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가족을 추방했다. 이 가족은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곧 돌아가려 했지만, 기약없는 난민 신세가 됐고, 1930년대 초반이 돼서야 프랑스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입국 거부와 허가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그는 고작 5살에 ‘서류’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카민스키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13살부터 세탁 공장, 염색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 터득한 염색과 탈색 기술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데 활용됐다.

헤럴드경제


1943년 일가가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아르헨티나 영사 청원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카민스키는 친구들이 모두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부탁으로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여권, 신분증, 결혼증명서 등 나치의 추적을 피하는 데 필요한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덕분에 그는 레지스탕스 네트워크에서 유명해지면서 주문이 쇄도했고, 일상생활과 꿈도 포기한 채 묵묵히 작업을 완수해 사람들을 구했다.

카민스키의 위조 작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됐다. 팔레스타인에 새 조국을 건설하려던 유대인, 제국주의 프랑스에 맞서 싸운 알제리인, 베트남의 전장에서 탈영한 미군 병사, 혁명의 불길이 타오른 남미의 망명자 등 1만여 명은 카민스키가 만든 위조 여권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는 무려 30년의 세월 동안 위험을 무릅쓰며 헌신했지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소명이자 윤리로 삼았다.

“위조범으로서 내 삶은 끝없는 저항의 연속이었다. 나치즘이 패퇴한 후에도 나는 불평등, 분리 정책, 인종 차별, 불의, 파시즘, 독재에 저항해 왔다. 더 나은 세상은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한 힘을 보탰던 것이다. 그러한 세상이 오면 더 이상 위조범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레지스탕스 위조범의 생애/사라 카민스키 지음·이세진 옮김/빵과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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