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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한겨레 그림판’ 같았던, 윤석열 석방 뒤 거리풍경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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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92년 12월22일치 한겨레 그림판 ‘거리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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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준 | 전국팀장



9일 일요일 아침 출근길. 거리 풍경은 며칠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서류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사람, 백팩을 멘 채 종종걸음으로 학교에 가는 사람, 여행용 가방을 끌며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 12·3 내란사태로 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52일 만에 법원의 구속 취소와 검찰의 항고 포기로 풀려난 다음날이었다. 거리에서 본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는 듯했다. 나 혼자만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이날 거리 풍경을 보며 문득 ‘한겨레 그림판’이 떠올랐다. 한겨레가 창간한 1988년 5월15일부터 연재하는 정치만평이다. 창간 때부터 8년 동안 이 만평은 박재동 화백이 맡았다. 그의 만평 가운데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게 1992년 12월22일치에 실린 ‘거리풍경’이었다. 이 만평은 구멍 뚫린 가슴으로 무표정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 모습을 보여준다.



‘거리풍경’은 김영삼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뒤 신문에 실렸다. 내란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불법 계엄으로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고, 이어 내란에 함께 가담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 이들 세력의 회유에 넘어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하고 1992년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독재 세력과 민주 세력이 한판 붙은 대선에서 김영삼은 이겼고, 민주세력을 지지한 많은 이들은 심한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거리풍경’은 그런 시민들 마음을 담은 그림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뻥 뚫린 시민들 가슴은 요즘 흔히 말하는 ‘마상’(마음의 상처)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는 걸. 회사에 도착한 뒤 텔레그램과 카톡에서 ‘마상’ 입은 여러 사람의 메시지가 속속 올라왔다. ‘윤석열이 대통령에 복귀해 제2의 계엄을 일으키면 어쩔’, ‘윤석열 석방으로 불면의 밤이 다시 찾아왔다’, ‘어제부터 내란성 스트레스가 또 시작되고 있다’ 같은 내용이었다. 내란 우두머리가 석방되자마자 주먹을 추어올리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다시 내란의 밤을 떠올리며 ‘마상’을 입은 것 같다. 출근길 길거리에 무심하게 지나쳐간 절반 이상의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싶었다.



내란이 성공했다면 우리 일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술집에서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대통령 실정을 비판하며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을까? 지하철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유튜브를 자연스레 볼 수 있었을까? 이런 소심한 생각은 더 큰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비상계엄 비선으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수첩엔 체포되거나 구금되거나 사살될 이름이 올랐다. 1차 대상은 500여명이었다. 내란이 성공했다면 2차, 3차 대상자도 늘어날 게 뻔했다. 나도, 당신도 끌려갈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잡혀갈 수 있었다. 수첩엔 중국 용역업체나 북한을 활용하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중국 스파이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반역자와 배신자라는 누명을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남미나 아프리카 독재국가의 옛이야기가 우리 미래의 얘기가 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최악의 독재자로 불린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은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의회와 법원을 정지시키고 ‘더러운 전쟁’으로 불린 서슬 퍼런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정권에 반대한 평범한 시민까지 하나둘 사라졌고, 바닷속에 수장됐다는 소문만 파다한 시민도 수만명이었다.



일요일 밤 퇴근길. 거리엔 휴일 끝자락을 아쉬워하는 듯 사람으로 붐볐다. 친구와 함께 마신 술에 불콰한 사람들,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사람들. 지난달 25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에서 나온 시인과 촌장의 노래 ‘풍경’이 떠올랐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봄이 오는 거리에서 앞으로도 보고 싶은 그런 풍경이었다.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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