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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창] 홀로코스트 생존 건축가의 美이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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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립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명예교수

이투데이

<‘브루탈리스트’, 브래디 코베 감독, 2025년>

건축가인 라즐로 토스는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강제수용소 생존자이다. 그는 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아내는 소련 점령 지역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사촌이 운영하는 가구점 일을 도우며 새 삶을 시작한다. 어느날 한 갑부의 아들이 그들을 찾아와 아버지에게 ‘깜짝 선물’ 한다며 그의 서재를 리모델링해달라고 한다. 라즐로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 해리슨 밴 뷰런은 크게 화를 낸다. 아들은 약속한 공사비를 주지 않고, 이 일로 사촌은 라즐로를 쫓아낸다.

몇 년이 지나, 라즐로는 구호단체 신세를 지며 노동일을 하고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그에게 해리슨이 찾아온다. 그 서재 디자인이 호평받았으며, 라즐로가 유럽에서 꽤 이름있는 건축가였음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밀린 돈도 준다. 그리고 그를 파티에 초대한다. 그 파티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대규모 기념관 건설 프로젝트를 라즐로에게 맡기겠다고 공표한다. 라즐로의 아내와 조카를 미국으로 오게 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 건설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사전지식 없이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라즐로 토스가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에서 허구의 유명인을 내세우는 건 드물다. 가령 조선시대 배경의 영화에서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영의정이 등장하는 건 생각하기 어렵지 않나. 평범한 서민이라면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역사책에 나올 만한 인물을 허구로 하는 건 드물다. (그런 영화가 없지는 않다. ‘벨벳 골드마인’(1998)이 한 예다. 가상의 유명 록스타가 등장한다) 라즐로는 일반 역사책은 아니라도 건축사에는 나올 만한 인물이다. 더구나 ‘브루탈리스트’는 이야기 내용뿐 아니라, 기법적인 면에서 기록영화 흉내를 낸다. 후반에 공사 현장을 보여줄 때 가끔 옛 TV 같은 4:3 화면이 된다. 마지막에 조카가 연설할 때는 홈무비 같은 화면이다.

이런 점들이 새로운 시도로 여겨졌다.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진 또 하나 이유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예술가가 건축가라는 점이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삶이 힘든 예술가는 대개 화가, 음악가, 소설가 같은 부류 아닌가. 건축가는, 적어도 영화에서는, 대개 멋지고 삶에 여유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스테레오타입을 깬다. 조금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 주인공 역을 맡은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다. 그가 영화 전체를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피아니스트’(2003)에 이어 두 번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둘 다 유대인 역할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 영화는 뚜렷한 감명을 주지 못했다. 영화 끝 무렵에 라즐로는 ‘그들은 우릴 원하지 않아, 우린 아무것도 아냐. 벌레 같은 존재야’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울림이 없었다. 소수민족 이민자로서 겪은 차별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영화 중에 그런 장면이 몇 번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물론 이탈리아 갔을 때 발생한 사건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거기서 해리슨이 노골적인 반유대적 발언을 하며 취한 라즐로를 강간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도 뜬금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자본주의자일지언정 특별히 악한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필자가 미국 문화를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의 ‘에필로그’는 라즐로의 회고전이 열리는 건축 비엔날레 장면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라즐로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다. 중년이 된 조카가 삼촌의 그 작품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었다)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삼촌과 숙모가 갇혀 있었던 강제수용소들을 모델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심오한 주제이다. 그러나 영화가 다 끝났는데 뒤늦게 나타난 느낌이다. 상영시간이 세 시간이 넘는다 해도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 한 게 문제일 수 있겠다.

[이투데이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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